정갈한 시어로 존재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김명리 시인의 세번째 시집 출간! 물의 이미지를 중심에 놓고, 정갈한 언어로 처연하리만치 아름다운 서정을 그려낸 바 있는 김명리 시인의 세번째 시집 『적멸의 즐거움』이 출간되었다.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하면서, 깊은 상처와 강한 자의식을 시인 특유의 격정적 리듬으로 표출해온 김명리 시인은, 그후 8년여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서 보다 정련되고 정화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총 63편의 시들로 짜여진 『적멸의 즐거움』에는 세월의 두께 위에서 피워올린 환한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환한 세계는 순진무구한 세계가 아니라 상처 속에서, 그 상처를 딛고 일으켜 세운 환함이다. 폐허의 유적들을 답사하는 시인의 눈길은 쓸쓸하고 적막하지만, 그 폐허들은 시인의 언어에 의해 소멸에서 신생의 차원으로 거듭난다. 이것이 바로 김명리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펼쳐보이는 새로운 서정의 진경(眞景)이다. 어둠과 비애에 대한 강한 자의식이 지배하던 이전의 시편들이 이번 시집에 와서 자연을 만난 것이다. 시인은 어둠뿐이던 폐쇄 공간을 열어젖히며 거기에 생명의 빛을 스며들게 한다. 폐쇄된 시적 공간이 마침내 자연과 우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를 향하여 열리기 시작한다. 『적멸의 즐거움』은 김명리 시인 시세계에 분명한 전환점인 것이다.
신생과 훼멸의 눈부신 접목, 존재를 초탈하는 깊고 드넓은 적요의 세계
김명리의 세번째 시집 『적멸의 즐거움』을 관통하는 주된 정서는 ‘적요’이다. 인간의 소박한 소망과 헛된 욕망이 천년의 세월에 씻겨 텅 빈 절터로 남은 공간에서 만나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그 고요의 소리로만 남겨진 세월의 무게가 빚어낸 적멸의 공간에서 시인은 “삐걱대는 맨 뼈다귀에 바람소리나 들이고 있는 저/적멸” “저 가득가득 옮겨앉는/햇빛부처, 바람부처, 빗물부처”(「적멸의 즐거움」)와 같은 폐허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저 사어(死語)의 공간에서 시인은 과거로, 그러니까 저 절터의 준공 시기로 돌아가는 듯 하지만, 시인은 과거에서 되돌아나와 현재의 삶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김명리 시 곳곳에 무르녹아 있는 “천년을 기어 뻘밭을 통과한/진흙게“(「먼 길」)의 고통은, 바로 시인 자신의 고통이다. 시간과 공간을 온몸으로 폐허를 통과하는 자의 고통은 그러나 생을 견디는 도저한 힘으로 전환되고, 그것은 다시 자기 자신, 그리고 세계와의 화해를 거쳐 초탈의 경지를 향해 환하게 열려 있다. “저 어둠들을 비추기 위해/겨울산 바위 벼랑끝은 저다지 환하고” “노래는 다시 시작되지”(「다시 부르는 노래」). 이 시집은 한 마디로, 폐허 위에서 신생을 위해 ‘다시 부르는 노래’인 것이다.
김명리의 이번 시집에서 자연은, 시인의 감정을 절제하고 순화시키는 중요한 매개로 작용한다.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폐사지 풍경을 자기화하는 김명리의 시는, 문학평론가 김양헌씨의 지적처럼 “김명리의 시를 다른 여행시처럼 정갈한 자연 묘사나 섬세한 섭리의 발견에 두지 않고, 농익은 고통이 뿜어내는 비애의 정서를 강하게 환기시키는 자리에 서도록 만든다.” 꿈의 추구와 현실적 좌절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시의 경계로 삼아 그 경계 위에서, 어둠과 밝음의 역동적 상관성을 투명한 비애로 이끌어내는 김명리의 시는, 최근 시단에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여행시’와 ‘선시풍’의 한계를 극복하고 ‘김명리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여행지(폐사지)에 담겨 있는 장소성(역사성)에 함몰되지 않는 동시에, 가벼운 깨달음의 포즈에서 벗어나 있는 김명리의 ‘적멸의 시학’은 기나긴 모색기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세기말/세기초의 한국 시단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