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릿길
- 저자
- 김익두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일
- 1999-11-27
- 사양
- 94쪽 | 변형신국판
- ISBN
- 89-8281-223-7
- 분야
- 시
- 정가
- 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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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은자처럼 조용하게, 맑고 서늘한 서정의 세계를 일궈온 김익두 시인의 두번째 시집. 언어를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 언어의 여백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시적 전략이 단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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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익두 시인은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전북대학교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평론 「동화(同化)의 시공과 재생에의 언어」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현재 전북대학교 인문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91년 {객석} 연극평론상을 받았으며, 시집 {햇볕 쬐러 나오다가}(199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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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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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리뷰
과작, 맑디 맑은 서정
은자처럼 조용하게, 맑고 서늘한 서정의 세계를 일궈온 김익두 시인의 두번째 시집 {서릿길}이 출간되었다. 첫 시집 {햇볕 쬐러 나오다가}를 낸 지 꼭 10년 만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치고 있고, {객석} 연극 평론상을 받는 등 비평 활동을 겸하고 있지만 이번 시집에서 확인되는 것은 겨울산 바윗등 틈바귀에서 한 그루 소나무의 “쓸쓸한 푸르름”을 발견해내는 지극한 시인의 마음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50편의 시는 10년이라는 시간에 비추어본다면 턱없는 과작이다. 그러나 그만큼 시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조심스럽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과작인데다가 대부분의 시가 간결하고 짧은 것이어서, 언어를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 언어의 여백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시적 전략이 단단해 보인다. 김용택 시인이 이번 시집에 붙인 발문이 이러한 사정을 꿰뚫고 있다.
“익두의 시는 짧고 간단하고 단순한 세상을 이루는 자연 앞에 있다. 시는 간결하고 짧지만, 그러나 감동은 잔잔하고 넓게 세상에 다 번진다. 익두의 시를 읽고 있으면 깊은 산 속 옹달샘 가에 앉아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서늘하게 깨어온다. 아침 산그늘에 갇힌 풀꽃들, 지는 햇살을 받아 빛을 내는 모든 풀잎들, 그 찬란한 것들과 맑은 소주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익두의 눈은 쓸쓸하고, 맑다. 소주처럼 참 맑다.”
여백의 시학
김익두 시인은 자연과 일상 속에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 작은 것들에서 시인이 길어올리는 것은 놀랍게도, 적막과 공허 속에 깃들인 평화와 희망의 빛이다. 적막/공허와 평화/희망의 사이는 아득하고 깊다. 손쉽게 연결될 수 없는 대척점의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김익두의 시는 여백의 시학을 통하여 적막/공허에서 평화/희망의 단초를 찾아낸다. 시집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초겨울, 완산」에서 이 여백의 시학의 위력을 추출하고 있다.
그대 없는 숲에서 나무를 본다.
아이는 이제 아홉 살,
이대로 산을 내려가긴 싫다.
숲은 고요하고
새들은 없다.
잠시,
희끗희끗 눈발이 보이기 시작하고
아이의 질문도 잠시 멈춘 사이,
나무들은 기쁘다.
―「초겨울, 완산」 전문
오형엽에 따르면 “숲은 고요하고/새들은 없다”라는 적막과 고독이 마지막 연에서 “나무들은 기쁘다”라는 희망으로 역전되는 것은 4연의 “잠시”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것은 순간의 여백이며 빈틈이다. 곧 침묵이다. 이 여백과 침묵의 깊이를 통해 김익두의 시는 적막을 희망으로 전이시키며, 겨울 속에서 다가올 새봄을 본다. 김익두 시의 여백의 시학은 신생의 정신을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백의 시학은 또한 그의 시를 정밀(靜謐)의 아우라로 감싸는 동력이 된다. 쓸쓸함과 따뜻함, 공허와 희망이 교차하는 김익두 시의 고요와 정밀감은 여백을 빚고, 여백을 견뎌내는 시인의 오랜 응시의 시간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독자에게 긴 울림을 남긴다. 김익두의 여백의 시학은 시집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 여백의 시학은 단순한 언어 경제에서 비롯하는 것은 아니다. 시적 대상을 응시하고 마침내 그것을 육화하는 시간의 담금질과, 그렇게 담금질해낸 언어를 새롭게 배치하는 구성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백은 그때 생겨난다. 김익두의 시는 추사의 {세한도}처럼 보아야 한다.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가 느슨하게 구축해놓은 여백으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한편, 김익두의 시는 계절 감각에 매우 민감하다. 계절을 단순한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다시 말해 계절을 소재적 차원에서 수용한다는 지적이 아니다. 그의 시는 순환하는 계절에서 우주적 리듬을 읽어낸다. 적막과 공허에서 평화와 신생을 찾아내는 여백의 시학은 이 우주적 상상력에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가 바로 김익두의 시를 소박한 서정시와 구분짓는 지점이다. 겨울봄여름가을로 진행되는 시집의 구성도 시인의 상상력과 주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김익두 시인의 {서릿길}은, 심심찮게 시의 죽음이 논의되는 요즘, 오랜만에 만나보는 정통 서정시의 한 진경이다. 아마도, 시가 부활한다면, 그 부활의 한 장소는 김익두 시인이 지켜오고 있는 저 견고한 시정신일 것이다.
은자처럼 조용하게, 맑고 서늘한 서정의 세계를 일궈온 김익두 시인의 두번째 시집. 언어를 극도로 절제하는 대신 언어의 여백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시적 전략이 단단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