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소설에서 서민적 삶의 훈기와 활력을 소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창훈의 세번째 소설집. 그는 동세대 작가들에서는 좀체로 접하기 어려운 걸쭉하고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공식적 담론의 그늘 속에 있는 사회적 방언들을 풍성하게 살려냄으로써 사회의 하층이나 변방에 있는 농어민 혹은 서민의 삶에 적절한 표현을 주어왔다. 주목할 것은 그 소설적 표현들이 기왕의 민중문학적 전통에 이어져 있으면서도 그 이념적 도식으로부터는 자유롭다는 점이다. 한창훈은 억지스러울 수 있는 정치적 전망 대신에 서민적 삶의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활력에 자신의 소설 언어를 내맡긴다. 그렇게 해서 돋을 새김되는 공동체의 기억과 생명의 윤리가 자연스럽게 오늘의 타락한 문명을 비판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성찰하게 하는 자리, 그것이 한창훈 소설의 의미있는 현재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 소설집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은 작가의 기왕의 면모가 여실하면서도 변화의 모색 또한 만만찮다. 한창훈 소설의 원형적 공간이라 할 ‘바다’의 압도적인 위상은 여전하되, 거기서 자주 ‘죽음’과 대면하는 실존적 성찰의 공간을 빚어내는 작가의 시선은 방언을 절제하는 서정적 묘사와 함께 좀더 심층적인 인간 이해로 나아가려는 작가의 의욕을 읽게 만든다. 「춘희」의 왁자한 카니발적 활력과 「지상에 남은 마지막 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의 조용한 내면 응시가 극히 대조적인 소설적 자장을 이루는 가운데, 「돗 낚는 어부」 「접붙이는 여자」의 원시적 생명의 바다가 모태처럼 놓여 있는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는 한창훈 소설의 새로운 2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즐겁게 확인한다.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상처와 상실의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압도적인 죽음과 이별의 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누이를(「지상에 남은 마지막 밤」), 어미를(「춘희」), 아내를(「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 연인을(「먼 곳에서 온 사람」 「접붙이는 여자」) 혹은 환상(「변태」)이나 희망을(「목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잃고 ‘세상의 끝’으로 밀려난다. 그런데 그들은 거듭 배반과 조롱을 일삼는 삶을 조용히 껴안는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다 (우리) 몸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기차는 가고 또 온다는 것을, 풍랑이 지나면 바다가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껴안음의 시선이 어떤 포즈가 아니라 ‘세상의 끝’에서 어렵게 마련되고 있음을 작품집 도처에서 본다.
「지상에 남은 마지막 밤」은 직장을 잃고 전전하던 화자가 “영혼의 비옥한 옥토”를 찾아 바다로 가기 전 뭍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그리고 있다. 외국 화물선 선원이 되어 낯선 바다로 떠나기 전날 밤, 화자는 홍등가 완월동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식모살이 하러 갔다 연탄가스로 죽은 누이를 향해 애잔하고 비감어린 제망매가를 부른다.
「춘희」는 마을 사람들이 차려준 백세 잔칫상을 받아놓고 급사한 연춘노인과 암으로 죽은 엄마의 죽음을 통해 주인공 춘희가 깨닫게 되는 삶의 그러함을 ‘몸’에 대한 뛰어난 성찰과 함께 그리고 있다. 삶의 덧없음이 “비누랑 똑같다”는 어머니의 이야기와 잔칫집이 곧바로 초상집이 되는 에피소드를 통해 일견 삶의 허무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지만, 작가가 정작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동서하는 더 큰 생명의 질서, 그리하여 거기에 순응하는 공동체의 예사롭지 않은 지혜다.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은 아내를 잃은 남편의 망부가이다. 사내는 아내 선영이 교통사고로 죽자 비탄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 “세상의 끝”인 바다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자살할 결심이던 그는 바다라는 망망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절망의 끝을 딛고 일어나 온전히 아내와 결합한다. 사내의 절규가 못내 잊을 수 없는 울림을 남기는 소설이다.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열여섯 살 난 가난한 중학생 경호의 절망과 희망을 그리고 있다. 엄마는 죽고 아버지는 동네 농장에서 품을 팔거나 노름꾼들에게 방을 빌려주고 자릿세로 먹고산다. 짝사랑하던 방희는 다른 오빠와 섹스를 한다. 그러나… 경호는 삶을 놓지 않는다. 수채화처럼 담담히 그려진 성장소설이다.
「먼 곳에서 온 사람」은 숲의 여자와 바다의 남자가 만나 나누는 원시적 순정의 교류가 시같이 아름다운 문장을 타고 흐르는 작품이다. 바다를 떠나 도시를 헤매던 부랑자와 깊은 사랑에 빠졌던 화자는 결국 바다로 돌아간 남자를 그리워하며 서로 다름을 사랑했던 지난 시절을 추억한다. 문장 하나하나가 보석 같은 빛을 발하는 소설이다.
「그대, 저문 바닷가에서 우는」는 아들이 없다는 핑계로 평생 바람을 피우는 오빠를 둘러싼 이야기다. ‘쓴맛 단맛 볼 대로 보면서 갈고 닦은 바 있는 베테랑 급’ 애인과 바람난 사실을 알고 ‘태극 철학관’을 찾은 누이들은 ‘독한 것’을 떼기 위한 비장의 방법을 처방받는다. 그 방법인즉, 새 애인인 요정 마담의 팬티를 벗겨 깊은 바닷물 속에 던져버리는 것. 속도감 있는 상황전개와 하층사회의 속어, 비어의 활달한 구사가 돋보인다.
「강물은 흘러 어디로 가는가」는 철로변 포장마차에 모인 다양한 인물군상이 풀어내는 속이야기를 스케치했다. 하루하루 간신히 먹고사느라 망해볼 시간도 없는 주인, 학원은 부도 직전이고 아내는 친정으로 가버린 부원장, 늘 안주 먹을 돈도 없이 달랑 소주 한 병 값을 들고 포장마차를 찾는 가방 사내. 이들은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진부한 주제를 놓고 자못 심각한 토론을 벌인다.
「변태」
“그 시절 내게 충만했던 것은 결핍과 죽음이었다”라고 독백하는 화자가 죽음과 성(性)을 한몸에 끌어안고 5월 광주의 비극을 통과했던 성장담. 선술집 여인에 대한 화자의 뜨거운 성욕이 광주의 피비린내와 병치되며 진정한 성장을 갈망하는 ‘애벌레’의 초상을 감동적으로 부조한다.
연작소설 형태로 이루어진 「돗 낚는 어부」와 「접붙이는 여자」는 연정을 품고도 못 이룬 홀아비 어부와 과부 잠녀의 사랑을, 오랫동안 기근이 든 노루섬을 배경으로 풀어낸다. 굶주린 섬사람들에게 돗을 먹이고 자신도 잠녀와의 사랑을 이루고자 했던 어부는 결국 돗과 함께 바다 속으로 딸려들어간다. 기근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바다에 자신의 몸을 주어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려는 어부의 죽음,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한창훈 소설의 원형적 모태인 바다의 크나큰 모성이다.
▶ 작품에 대한 평
막막한 바다 앞에서 인간은 왜소해지고, 왜소함을 깨닫는 순간에 인간은 철저하게 철학자나 주술가가 된다. 그가 얻은 왜소함의 감각은 하릴없이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는 주졸(走卒)에 불과한 현대인들에게 삶의 막막한 심연에 눈을 돌리게 하고, 잡답(雜沓)한 저잣거리의 삶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철학의 시간을 제공해준다. (김만수-문학평론가)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온갖 운세에 휘둘려 ‘세상의 끝’으로만, 끝으로만 밀려나는 사람들, 그들의 신산한 삶을 가지고 한창훈은 좀처럼 잊기 힘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바닥 모를 절망의 깊이로부터 솟아나는 극적 독백으로, 때로는 해학과 익살이 넘쳐나는 구수한 사설로, 때로는 힘차게 달리고 구르는 쾌속의 서사로. 한창훈 소설은 힘없는 서민들의 울분과 고통을 표현하면서 또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생명의 윤리를 소생시킨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자연의 마법과 인간 공동체를 끈질기게 기억하고 있는 그의 소설은 오늘의 문학이 타락한 문명에 던지는 가장 야성적인 항변이다. (황종연-문학평론가)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바다를 만난다. 아득한 그리움의 바다, 혹은 생의 미친 몸부림인 바다. 그곳에, 혹은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생의 알몸을 부드럽게 더듬는 물 속의 물의 흐름. 그것을 그처럼 섬세하게, 따뜻하게 치열하게 뭍으로 길어올리는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애절함이 그의 바다 앞에서 먹먹한 가슴을 위로받으리라. 그는 이미 그 깊은 속에 있으니. (김인숙-소설가)
* 책임편집:김현정, 김미영(927-6790, 내선 217/212)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온갖 운세에 휘둘려 세상의 끝으로만, 끝으로만 밀려나는 사람들. 그들의 신산한 삶으로 만들어낸 좀처럼 잊기 힘든 이야기. 우리들의 의식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자연의 마법과 인간 공동체를 끈질기게 기억하고 있는 한창훈의 이번 소설들은 오늘의 문학이 타락한 문명에 던지는 가장 야성적인 항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