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제1회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양순석은 대표적인 과작의 작가다. 1994년에 낸 첫 소설집 『지워지지 않을 그 연둣빛』에서 삶의 비극성에 대한 도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과 팽팽히 길항하는 추억의 형식을 강렬하게 보여준 바 있는 작가는 특유의 단아하고 정갈한 문장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등단 21년 만의 첫 장편에 쏟은 작가의 혼신을 작가의 말에서 엿볼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내기까지 다시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정작 글을 쓴 시간보다 쓰기를 꿈꾸고, 갈망하고, 괴로워하고, 머뭇거린 시간이 그 몇 갑절은 될 것이다. 그렇듯 아주 느리게 이 소설을 써왔다. 꼭 쓰고 싶은, 써야 할 소설이었으므로 이것말고 다른 계획은 일체 없었다.
이러한 작가의 혼신은 단편 이상의 밀도를 보여주는 문장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를 두고 문학평론가 김수이씨는 "그녀의 소설은 고독하지만 의미 있는 문학세계를 추구하는 열정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우리 소설이 불과 얼마 전에 지나온 수공업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만들며, 그녀 자신에게는 가장 정직하고 고통스러운 내면의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평한다.
상실과 죽음의 시선으로 탐문하는 사랑과 생의 의미
『나무가 아름다워지는 시간』은 주인공 정령의 내면의 영사기를 통해 상영되는 한 뭉치의 오래된 필름과도 같은 작품이다. 목에 난 끔찍한 상처 때문에 세상을 증오하다 결국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도망친 어머니. 아버지는 아홉 살 정령을 보육원에 맡기고 배를 탄다. 외항선원이라는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피아노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은 스스로 상처를 다스리는 안간힘이고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출구였겠지만, 어린 정령의 고립감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아버지는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와 재혼해 희령이라는 여동생을 낳음으로써 정령에게 또한번의 상실과 소외를 가져다준다. 새엄마의 남동생이었던 대학생 선은 그렇게, 좀처럼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던 열아홉 살 정령에게 빛과도 같은 존재로 왔다.
열아홉 살의 여름날, 그는 내게 왔다. 형체도 소리도 없는 텅 빈 설렘의 향기로 다가와 노랫소리와도 같은 울림의 목소리로 나를 두드리다 기어이 암흑과도 같은 폭우 속으로 나를 던져넣었다.
『나무가 아름다워지는 시간』은 선에 대한 금지된 사랑을 통해 간신히 삶을 지탱해나가는 주인공 정령의 성장 없는 시간,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을 힘들게 인화해나간다. 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자살하는 친구 미주, 마약과 알코올에 생을 반납해버리는 태성 등 정령 주변의 인물들 역시 상처 속에서 고통스럽게 시간을 지워나간다. 오랜 이국 생활 후, 암선고를 받고 죽음과 함께 선이 살고 있는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온 정령의 추억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러므로 철저하게 비극적이며 불모의 시간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바로 그만큼 좌절된 사랑의 시간들이 마침내 이르고자 하는 황금빛 구원의 순간은 눈부시게 숨어 있다.
희망을 버리고 온전히 죽음과 대면했을 때에 이르러서야 나는 돌아올 수 있었다. 아니, 생을 버리고서야 나는 되돌아올 수 있었다. 오직 생과 맞바꿀 것이 있는 이곳으로.
정령에게 생과 맞바꿀 것은 선이라는 영원한 빛이었다. 그렇다면, 상처와 고통의 자리가 바로 구원의 빛이 스며드는 자리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마치 처음 뿌리내린 곳에 평생을 붙박여 사는 나무처럼, 과거에 고착된 채 한결같이 파괴와 고통과 죽음에 점령당해 있다. 그러나 남루한 생을 구원할 생의 빛, 생을 버티어갈 힘, 생의 진정한 비밀은 여전히 그들 앞에, 고통과 죽음 속에 존재한다. 이 작품의 감동적인 전언은 여기에 있다.
이 책에 대하여
『나무가 아름다워지는 시간』은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들의 몸부림과 그 방황의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폐한 소녀 정령은 선에게서 사랑과 영원의 세계를 보며, 첫 결혼에 실패한 정령의 아버지는 피아노와 희령을 통해 세상과 화해하고, 평생 이기적이었던 정령의 엄마는 뒤늦게 딸을 찾아와 용서를 구하고, 의붓아버지에게 유린당한 미주는 번제의 제물이 됨으로써 안식을 얻으며, 폐인이 되었던 태성은 흑인 여자 앤을 만나 삶을 되찾고, 투병중인 정령은 그런 태성에게 다시 위로받는 등 구원의 삽화는 소설의 도처에 깔려 있다. 이 소설이 도달한 구원의 빛은 몰락과 구원, 죽음과 삶이 충돌하면서 빚는 제3의 빛인 것이다. 그 빛은 소멸하면서 더 빛을 발하는 일몰의 빛이며, 내면의 반향으로 살아나고 지속되는 정신의 빛이다. -김수이(문학평론가)
*신국판/320페이지/값 8,000원
*출간일: 2001년 5월 31일
*책임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214)
삶의 비극성에 대한 도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과 팽팽히 길항하는 추억에의 기록. 등단 21년 만의 첫 장편소설에서 쏟아지는 정갈하고 단아한 문장의 축제. 구원을 갈망하는 몸부림과 그 방황의 여정 끝에서 당신의 나무는 비로소 아름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