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문학동네} 하계문예공모를 통해 등단한 류소영의 첫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들에는 90년대를 누구보다도 실감나게 살아온 작가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 있다. 투쟁의 열기가 지나간 후 한 발 늦게 역사 속으로 뛰어든 90년대 초반 학번, 늦깎이 세대들이 아파하고 침묵하게 된 사연, 그들이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온몸으로 살아낸 90년대 이야기. 90년대에 대한 작가의 애착은 작가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절망과 한숨과 모색과 좌절이 모두 담겨 있는 1990년대를 나는 참 사랑한다. 내 이십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내 대학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연대에 나는 정말 많은 것을 잃고 또 얻은 기분이다. 자주 지겹겠지만, 또 자주 기가 꺾이겠지만, 때때로 모든 것이 다 그저 지나간다 느껴지겠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그때, 내 이십대를 잊지 않으며 살아가고, 또 쓰려 한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씨는 "류소영의 소설은 이제 시효 정지 상태에 이른 386 직후 세대들이 온몸으로 살아냈던 90년대에 관한 후일담이다. 그녀로 인해 90년대는 막연한 추상으로부터 빠져나와 그 시대를 앓았던 구체적 개인들에게 일상적 삶이라는 옷을 입혀주기 시작한다"라고 평하고 있다.
피스타치오 껍질 틈으로 보는 뒤늦은 세상
류소영의 소설은 뒤늦은 세대의 후일담과 부적응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좁다][내 마음속, 가족사진][심연에서 졸다]는 전자에, [피스타치오를 먹는 여자][달 뜨는 날이면 봉숙이를 만나야 한다][해에게서 海에게][민정(旻庭)과 이견(異見)][동그라미 그리려다][그러나 계속 나아가기 위하여]는 후자에 속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하던 주인공이 아버지와 함께 산에 오르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 문으로 들어가면 좁다]는 재수생의 신분으로 4·19를 보내야 했던 아버지와 모순되고 소극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반발심을 갖고 자라온 주인공이 일종의 연대의식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교조 출범, 4·19혁명, 5월 광주 민중항쟁, 87년 6월 항쟁, 87년 노동자 대투쟁 등 현대사의 흐름에 편입되지 못했으나 그 죄책감을 가슴에 묻고 지내는 아버지와 나는 아직 서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정쩡한 세대로서 겪은 아픔과 괴로움, 방황은 서로 닮아 있다. 그들은 어느새 함께 보폭을 맞추며 산에 오른다.
심연에 머리 자르러 간다로 시작되는 [심연에서 졸다]는 헤어숍 심연에서 머리를 자르며 떠오르는 사유의 흐름을 적고 있다. 학생 운동을 하던 선배, 오래 전에 했던 독서모임, 미용사라는 프로정신, 주인 여자가 흥얼거리는 노동요…… 미장원 특유의 편안하고 나른한 분위기에서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아릿한 기억이 떠오르고 그 기억 속에서 나는 깜빡 잠이 든다.
[내 마음속, 가족사진]은 주인공이 대학 선배 현의 전화를 받고 목포로 내려가 그를 만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어딘가를 향해야 하는지 방향조차 알지 못한 채 독기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쳐 있던 대학생활에서 편안하고 따뜻한 힘이었던 현은 옛날 어머니의 첫사랑의 아들이었다. 그를 가슴에 가만히 묻고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달 뜨는 날이면 봉숙이를 만나야 한다]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부적응자 봉숙이 이야기다. 과다섬세증, 즉 반복강박에 걸려 있는 봉숙은 같은 상표나 장소 등에 집착하거나 사소하고도 복잡한 규칙들을 정해 일상에서 되풀이한다. 그러나 봉숙은 이런 되풀이들을 하나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달 뜨는 날을 즐기는데, 달 뜨는 날이란 일상에서 정해놓은 규칙들이 어느 한순간 무너지는 날이다. 지하철을 탈 때, 늘 타던 뒤에서 두번째 칸을 못 타게 된 경우, 혹은 시내에 나갔다가 노점에서 여행용 등산가방 같은 걸 엄청나게 비싸게 사고 마는 경우, 분명한 메뉴를 주문하는 원칙을 가진 봉숙이가 소나무 스페셜 정식을 먹고 브레머 스페셜 커피를 먹는 경우 등등. 달 뜨는 날에는 평소 정해놓은 규칙을 마음대로 어기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봉숙의 친구 나는 봉숙의 달 뜨는 날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씨는 봉숙의 달 뜨는 날의 의미르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강박이 세워놓은 엄격하고 반복적이며 숨쉴 틈 없이 빡빡한 규칙들의 방벽이 가차없이 부서지는 날이 바로 달 뜨는 날이다. 봉숙에게 강박적 규칙들이란 오히려 이 달 뜨는 날 이것을 어기기 위해서만 만들어낸다.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큼 혐오하되, 또한 떠나지 못할 만큼 사랑하는 이들, 부적응자들이 자주 취하는 자세. 봉숙이는 그처럼 일상의 규칙들을 따르되 그것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조롱하기 위해서만 따르는 것이다."
표제작 [피스타치오를 먹는 여자]는 병적으로 피스타치오를 좋아하는 여자, 특히 껍질에 집착하는 김연두를 그리고 있다. 몸에 꼭 맞으면서도 답답하게 막혀 있지 않은 피스타치오의 껍질과 씁쓰레하면서도 고소한 야생의 맛을 좋아하는 김연두는 자동차 없음. 일간지 두 가지나 보고 있음. 우유 싫어함. 학습지 배울 어린애 없음. 기타 구매하고 싶은 것 없음 이라는 쪽지를 현관문에 붙일 정도로 폐쇄적인 여자다. 나는 이런 김연두에게 흥미와 매력을 느끼지만 자신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김연두는 껍질이 열리지 않은 피스타치오들을 나에게 준 후 사라져버린다.
1997년 하계문예공모 수상작이었던 [동그라미 그리려다]는 유머러스한 문체, 대상의 특성을 포착해내는 재치와 순발력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전통적인 방식도, 그렇다고 근자에 유행하는 신세대 작가풍도 아니면서 양자의 장점을 고전적인 안정감과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으로 아우르고 있다. 젊은 눈에 포착된 노인, 명의 인상적인 모습은 작가가 이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웅숭깊은 시선을 지니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밖에 한때 무척이나 섬세한 기질을 가진 희곡작가 지망생이었던 삼촌이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술에 절어 사는 모습을 그린 [그러나 계속 나아가기 위하여], 가장 흔한 이름 김민정을 가진 여자와 다른 의견, 즉 이견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가 만나 이름 때문에 겪은 에피소드들을 수다로 풀어내고 있는 [민정(旻庭)과 이견(異見)], 금연학교에서 만나 흡연을 하며 친해진 사람들이 새해 벽두에 모여 서해를 보러 가게 된 사연을 그린 [해에게서 海에게] 등 이 소설집에 실린 다른 소설들은 사회와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연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이 부적응자들을 향한 작가의 시선은 연민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포함하는 뒤늦은 세대를 향한 연민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씨는 이들이 허물없는 의사소통에 성공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부적응자라는 연대감으로 묶여 있다. 류소영의 소설을 통해 우리 소설은 항상 배제당하고 손가락질당하며, 격리되고, 훈육되기 일쑤인 탈주가 아닌 방식으로, 탈근대적 주체들의 연대 정치를 고려해볼 만하게 만든다." 류소영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에 대하여
이즈음 우리 소설계에는 또하나의 세대가 출범중이다. 그리고 이 뒤늦은 세대의 출범을 할리는 마지막 징후가 바로 류소영이다. 그러나 류소영의 소설들은 더이상 징후라고 말하기 힘든 데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소설들은 아주 명백하고 담담하게 자신이 속한 세대들의 경험을 직접화법으로 진술함으로써 징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로 하여금 이 뒤늦은 세대의 뒤늦은 출범식은 완성된다. 그리고 90년대 소설이란 말을 90년대에 씌어진 소설이 아니라, 90년대에 관한, 그리고 90년대를 누구보다도 실감나게 몸소 살아냈던 작가들이 쓴 소설로 재규정할 때, 또한 그녀로부터 90년대 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김형중(문학평론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무에 그리 어려울까마는 청춘이 곧잘 우리를 그리로 몰고 가면 좀체 견디기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류소영의 소설을 읽다보면 천연덕스럽게 그런 일을 잘도 다루는 폼이 여간 재미있지 않다. 어쩌면 비눗갑하고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 그이의 힘이 거기서 나온다. 우리 사는 일에 자잘한 틈이 얼마나 많을까. 가만가만 그 틈새에 귀를 기울이는 풍경 속에 꼭 류소영이 들어앉은 듯해 돌아보게 된다. 우리 살아온 게 다 지면서 살아온 것 같지만 실은 그게 힘이 된다. 이 책에 실린 류소영의 소설들이 그런 얘기를 내게 들려준다. 오랜만에 어두운 골목길에 밝은 등 하나 내다 건 심정이 아닐 수 없다. -김연수(소설가)
*2001년 6월 25일 발행 /ISBN 89-8281-399-3 03810
*312쪽 / 값 8,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214)
초록빛 껍질 속 열린 틈새로 바라보는, 씁쓰레하면서도 고소한 피스타치오 같은 소설들. 투쟁의 열기가 지나간 후 한 발 늦게 역사 속으로 뛰어든 90년대 초반 학번, 늦깎이 세대들이 아파하고 침묵하게 된 사연, 그들이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온몸으로 살아냈던 90년대에 관한 후일담이 소설 어귀마다 가득하다. 90년대를 몸소 체험한 작가가 들려주는 90년대, 뒤늦은 세대들의 귀엣말이 귀를 간질이고 가슴을 여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