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마술의 노래』 『처음을 위한 춤』 『안개편지』에 이은 한영옥의 네번째 시집 『비천한 빠름이여』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특정 주제나 특정 방법론에 천착해 시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자연스런 어조와 호흡으로 시를 뱉어내는 한영옥, 그는 이전 시집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존재의 내면을 찬찬히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감성적 중량과 집요한 심혼의 떨림을 담아내는 형용사화된 시어들을 사용하여 직조한 그의 시는 세계를 인식하는 언어로 된 프리즘이며, 일상적 내면을 향한 성실한 성찰과 반성의 기록이기도 하다.
변해가는 존재를 제대로 읽으려는 집요한 욕망
긁힌 살 자국을 쓱쓱 지우고 둘러보면/쥐똥나무는 먼저 제 이름을 지워버렸다/어디론가 쥐똥들은 자취 없이 굴러가버리고/쥐똥나무였던 쥐똥나무만 우두커니 서 있다/민망스런 몸을 질질 끌어다/허공동굴에 꾸겨넣는 세상 것들이여/이름이 버린 육체들이 여기저기서 주저앉는다/正名의 지난함이 폭설로 곧 오리라/다시 한번 이름들은 지워지리라, 흔적 없이. ―[正名] 중에서
한영옥은 세상의 모든 불화와 갈등에 주목한다. 그 균열의 틈을 메우려는 시인은 언어와 그것이 감추고 있는 의미 사이에서 서성인다. [正名]에서 시인은 정명(正名)의 지난함을 쥐똥나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불완전한 존재와 언어사이의 틈, 이런 언어와 존재의 만남은 공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영옥은 언어가 변화하는 육체를 향해 있는 한 정명이란 불가능하리라는 것과 이름이 육체를 버리고 이름으로 남아 있는 한 정명일 수 없다는 깨달음을 계시하고 있다. 언어를 향한 철저한 부정의식과, 존재를 향한 도저한 허무의식이 엿보인다.
한영옥은 사랑이라는 시어를, 그의 욕망을 그것에 쏟아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좌절된 욕망이나 그 흔적에 불과한 것으로, 늘 변해 있고, 부패해 있기도 하다. 그는 시간과 동의어인 사랑을 향한 패배를 인정한다.
벌써 사랑이 썩으며 걸어가네/벌써 걸음이 병들어 절룩거리네/(……)/병든 사랑은 아무도 돌볼 수가 없다네/돌볼수록 썩어가기 때문에/누구도 손대지 못하고 쳐다만 볼 뿐이네/졸아든 사랑, 거미줄 몇 가닥으로 남아 파들거리네/사랑이 몇 가닥 물질의, 물질적 팽창이었음을 보는/아아 늦은 저녁이여/(……) ―[벌써 사랑이] 중에서
한영옥은 도처에서 사랑과 시간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있다. 모든 것을 의미 없게 만드는 시간은 그에게 비천하게 빠른 것이다.
한영옥에게 시쓰기는 중력과의 싸움이자 화해이다. 여기서 중력이란 말을 현실이라는 말과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중력은 현실의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더불어 시간이며, 사랑이기도 한 이 중력은 빠르게 변화해간다. 한영옥의 시는 이런 중력을 견디며, 싸우며, 화해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이 책에 대하여
한영옥 시인의 작품을 대할 때면 "숨은 신(神)이 진정한 신"이라고 한 파스칼의 말이 새삼스러워지곤 한다. 간결 단아한 편편의 작품에서, 겉으로는 안 그런 듯 속속들이 춥고 아린 울림이 깊고도 길어서, 이 정도로 대단하였구나 감탄하게 된다.
사소한 일상사나 사물들에 대한 신비로운 눈길과, 놀라운 상상력, 우리말의 풍요로운 구사력으로 격조 높게 빚어져, 그지없이 청아하고 향기롭다. 읽고 나서 눈감아 다시 음미하게 되고, 눈떠 거듭 읽혀지는 그윽하고 드높은 작품의 향훈이여. 시와 사람이 함께 한없이 부러울 따름이다. -유안진(시인·서울대 교수)
어떤 사랑도 조금은 절룩거릴 수밖에 없다. "벌써 사랑이 썩으며 걸어가네"라는 탄식과 "눈물기름에 충분히 녹아 계신 당신"이라는 깨달음 사이를 오가며. 그러한 환멸과 위로를 차례로 베풀어주는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주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은 나직하지만 단단한 발성을 통해 때로는 격렬한 외침을, 때로는 순연한 다독거림을 들려준다. 완강한 존재의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온 그 떨림 혹은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치명적 도약으로서 사랑이 남기고 간 아픈 무늬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청보랏빛 입술에 산그늘 걸치고/가을 풀섶으로 몸을 다 가린 용담꽃"과도 같은 이 늦은 개화(開花) 앞에서 서늘한 슬픔과 더불어 시간을 잘 견뎌낸 자에 대한 경의를 느끼게 된다. -나희덕(시인·조선대 교수)
*2001년 11월 23일 발행
*ISBN 89-8281-439-6 02810
*신사륙판/152쪽/값 5,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손미선(927-6790, 내선 217, 212)
시인 한영옥에게 시쓰기는 중력과의 싸움이자 화해이다. 여기서 중력이란 말을 현실이라는 말과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중력은 현실의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더불어 시간이며, 사랑이기도 한 이 중력은 빠르게 변화해간다. 한영옥의 시는 이런 중력을 견디며, 싸우며, 화해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