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출간
아포리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이어 이성복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가 출간되었다. 절판된 예전 산문집에서 일부를 가려 뽑고, 그후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산문들을 모은 것으로, 실질적인 두번째 산문집인 셈이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산문집에서 이성복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얼핏 서로 다른 이야기 같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은 하나의 축, 즉 시인의 삶과 글쓰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 2부 : 자신의 삶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 일상의 작은 경험들, 추억들을 통해 문학과 시를 이야기한다.
3부: 일종의 시론(時論)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 왜 시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시인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
4부: 자동차, 산길 등 일상의 장면들을 통해 얻은 단상들의 기록.
5부: 기형도, 이인성, 김현 세 사람에 대한 기억의 장이다.
책 속으로
나에게 시의 의미는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의 의미이다. 그리고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은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의 방법적 구체적 표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시란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의 구체적 방법적 이해이다. 시는 그것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사랑을 받아내는 그릇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시의 의미는 삶 앞에서 시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얻어진다.
* 액자 속의 사내를 찾아서 - 그의 삶, 그의 글쓰기
산문집의 첫 장을 열고 있는 이 글에서 이성복은 부제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과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삼십 년 가까이 시인의 책상 한구석을 지키고 있는 작은 액자에서 출발, 시인은 어린 시절 백일장을 시작으로 글을 쓰게 된 이야기며, 섬세하고 예민한 고양이 같은 자신의 성격, 군대 시절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일화들을 끄집어낸다. 모두 자신의 글쓰기와 관련된 이러한 일화들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문학의 지향점이 환(幻)으로써 환(幻) 닦기 환(幻)으로써 환(幻) 걷어내기 괴로움으로써 즐거움 얻기 미혹함 굴려 깨달음 열기임을, 도대체 환상이 아니면 진실은 구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한다. 책에 수록된 다른 글들에 대해, 시인의 시에 대해, 시인에 대해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초석이 되는 글이다.
이성복은, 뛰어난 시인과 뛰어난 산문가가 원래는 한 몸이라는 것을 행복하게 증거한다. 이성복의 산문을 읽다보면, 틀림없이 산문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시 속으로 들어가 있기 일쑤다. 담담하게 말과 말 사이의 산문적 고리를 걸며 전개되는 듯해도, 기어이는 그 깊은 곳에 깔려 고동치는 어떤 시적 비의(秘意)의 심장 맥박에 감응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산문 속에서도 한결같이 말의 근본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산문은 말 그 자체에 대한 끝없는 되새김질 끝에 시인-소의 입에 길게 물리는 걸쭉한 침과 같다. 그 침은 얼핏 더러워 보이지만(너저분한 일상을 다루는 것이 산문이니까), 눈을 지긋이 감으면 향기롭고 달콤하다. 더럽게 맛있기까지 하다. 카프카든 공자든, 석류 꽃잎이든 자동차든, 모든 것이 시인의 위 속에서 하나로 삭여져 그 침 안에 녹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어린 시절 아가를 위해 당신의 입 안에서 음식을 꼭꼭 씹어주시던 어머니의 그 지극한 사랑의 침이 아닐까. 이인성(소설가)
이성복은 뛰어난 시인과 뛰어난 산문가가 원래는 한 몸이라는 것을 행복하게 증거한다. 이성복의 산문을 읽다보면, 틀림없이 산문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시 속으로 들어가 있기 일쑤다. - 이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