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섬세한 관찰과 깨달음의 실부리 미묘한 비유와 유장한 가락, 건실한 세계관으로 빛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차분하고도 날카로운 직관의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신예시인 이정록의 첫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가 출간되었다. 중견이나 원로시인들의 중후한 시세계도 중요한 것이지만, 젊은 시인의 실험적이거나 탄탄한 시세계 또한 우리 문단을 밝게 비춰주는 등불이다. 23편의 「황새울」연작을 비롯하여 총 64편이 묶인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는 형태파괴와 같은 과감한 실험은 아니지만, 독특한 관찰의 눈을 통해 자신만의 시세계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데다가 농촌에서의 체험을 건실한 세계관으로 떠받치고 있어 더욱 든든하다.
196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공주사대 한문교육과를 졸업한 이정록 시인은, 1990년 『한길문학』을 통해 시단에 등장했는데, 한 해 전에는 『대전일보』신춘문예에 당선했으며, 1993년에는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 「혈거시대」가 당선되어 자신의 시적 역량을 재확인했다. 긴 습작기간을 반영하듯 그의 시들은 미묘한 비유와 유장한 가락,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조화롭게 만나 안성마춤의 유기와도 같은 단아함을 연출해낸다.
특히 이정록의 시가 주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다. 그가 관찰하는 것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사물들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나무를 소재로 한 시들을 보면, 시인이 사물을 얼마나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서시」 「나무 한 그루」 「버림에 대하여」 「참나무」 「탱자나무의 말」 「말뚝」 「은사시나무」 「한식」 「아버지가 박아준 못」 「큰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생각함」 「李氏家의 향나무둥치」 등의 여러 시와 「황새울」연작 중의 여러 시들의 시선 속에는 실로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시적인 진실의 세계를 향해 다양한 모습으로 자라난다.
시 속에 나무를 자주 등장시키는 원인을 시인은 친절하게도 「서시」에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단 세 줄밖에 되지 않지만 이 시는 이정록 시세계의 대문을 열어주는 요긴한 빗장이다. 이 시를 통해서 우리는, 이정록이 자주 등장시키는 나무들을 마을 가까이 있는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마을 가까이 있는 나무들은 사람들의 욕심이 야기하는 성화를 견디지 못해 상처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나무들은 흠집이 많은데, 왜 내 몸은 성한 것일까? 여기서 내 몸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포함한 진정한 몸이 나니라 육신으로서의 몸, 다시 말해,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몸이다.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몸은 성하긴 한데, "너무 성하다." 마을 가까이 있는 나무가 흠집이 많다면, 마을에 살고 있는 내 몸이 이토록 성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나무와 내 몸은 다양한 의미의 확산으로 파장을 일으킨다. 그 의미의 파장을 거칠게 분류해보면, 나무는 이 새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민중들을 상징하게 되며, 내 몸은 어려운 시대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위만을 찾는 소시민을 뜻하게 된다. 이정록의 시세계는 이와 같은 마을 가까이 있는 나무와 그 속에서도 성한 내 몸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전자는 후자에게 끊임없이 가르침을 전해주는 스승이 된다.
그 스승으로서의 나무는 「버림에 대하여」 「참나무」 「탱자나무의 말」 「은사시나무」에 대표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 나무들은, "단단한 성깔 아꼈다가 / 사람과 세상을 이어주는 / 손잡이가 되어주"(「참나무」)며, "헛된 욕심만 끌안고 사는 그대에"게 "피고름 그득한 세상을 향해 / 열매보다도 가시를 키우는 큰 뜻" (「탱자나무의 말」)을 가르쳐주며, "썩은 논리들이 발목을 휘감으면 / 울분과 증오를 중심으로 힘을 모"(「은사시나무」)아 우리들의 헛된 논리를 일깨워준다. 그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진술된다면 그것은 시로서의 생명을 잃게 될 것디다. 그러나 이정록의 시들은 각 나무들의 속성을 기막히게 이용하여 사람들의 참된 마음을 정감있게 노래하건, 인간의 오욕에 가득 찬 허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어서 시적인 재미를 풍부하게 해준다. "네가 참씨인 것은 / (........) / 해마다 터지는 새암배미 참말뚝까지 / 땀흘려 일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참나무」)라고 하거나, "은전처럼 반짝이는 너희들 중 / 몇몇은 말라죽었구나"(「은사시나무」)라며 환경오염의 주범인 도시인들을 공격하거나, 탱자나무는 "헛된 욕심만 끌안고 사는" 인간들과 "피고름 그득한 세상을"(「탱자나무의 말」)혼내주기 위해 가시를 키운다고 엄중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가 이렇게 울를 깨우치는 스승이 된다면, 나무의 역할을 하는 것은 단지 나무만이 아니다. 마을에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흠집이 많은 나무들처럼, 그러면서도 자신의 속성을 사람들을 깨우치는 나무들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해감 뭇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민중들도 내 몸을 깨우치는 훌륭한 스승이다. 헌책처럼 표지가 떨어지고 모서리가 닳아졌어도 가난한 마음들을 끌어안는 헌책방의 털보씨, 든든한 웃음으로 세태에 뒤진 산업을 이끌어가는 대장간의 이씨, 회구녁에 굵은 못을 박는 아버지, 그리고 어려운 시대? 살았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 스승들의 가르침에 의해 내 몸은 계속해서 깨달음을 획득하지만, 이정록의 시에서 그같은 깨달음 역시 직접적으로 표출된 예는 드물다. 그것들은 항상 어떤 사물들과 연관되어서 나타난다. 용수철, 염소, 멸치, 새, 무, 말뚝, 쑥, 아주까리, 매미, 요강, 해열제 따위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식물과 무생물들을 자신의 시적인 깨달음과 결합하여 시인은 세상 앞에 엎드려 반성문을 완성한다. 그 반성문은 여러 형식과 내용으로 나타난다. 그 형식과 내용은, 분노거나 자조거나 탄식이거나, 사랑과 삶의 아픔에 대한 고백이거나, 세상에 대한 풍자거나 서정이거나, 모두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보여준다.
이정록의 시세계를 설명함에 있어, 여기서는 나무와 내 몸, 이렇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보았지만, 사실 그 두 가지는 하나의 줄기로, 다시 하나의 뿌리로 연결된다. 그 나무의 아름다움은 일단 밖으로 나온 부분에 의해 나타나지만, 보이지 않는 땅 속 깊이 끊임없이 양분을 빨아올리는 관찰과 깨달음의 실뿌리와, 다시 그 양분을 끌어모으는 굵은 뿌리가 이정록 시의 지반을 튼튼하게 지탱하고 있다.
90년대 들어 민중문학의 쇄퇴와 함께 80년대에 가꾸었던 민중시의 건강한 뿌리를 너무나 쉽게 잘라버리거나, 모든 실험성을 부정하는 옹고집을 끝내 버리지 않는 면을 반성해야 하는 시점에서, 농촌체험을 통해 시대상황에 대한 진지한 통찰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신만의 시세계를 개척해나가는 이정록의 몸부림은 90년대의 시가 나아가야할 하나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