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중 시인의 두번째 시집 『참 오래 쓴 가위』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계를 엄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따뜻한 삶과 세상을 지향하고 있는 이희중 시인은 지금, 여기의 삶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를 나직한 어조로 풀어낸다.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주관적 시간관은 인간을 다시 삶의 주체로 이끌어,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해준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의 구성이 긴장감 속에서 전개되고 있지만, 그러나 순백하고 천진스런 정조가 이면에서 배어나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내 안의 어린 아이"의 순정한 정서가 배면의 창작 주체이며 동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해명된다. 홍용희(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 시간과 함께 다가오는 것들
완전과 완성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늙어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살아 있음을 대견해 하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견디기를 더 연습하겠습니다
울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노래―故 이균영 선생께」 중에서
시인은 요절한 작가의 주검 앞에서 미래라는 환상을 부정하고 현재에 충실할 것을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인간이 객체가 되어버리는 시간을 버리고 자신의 삶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그리고 미래의 시간에 두었던 가치를 현재의 시간으로 옮겨오는 이희중의 시 앞에서 독자들은 일탈의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추구해가는 것은 결국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성찰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의 시간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기존의 억압적인 관행, 금기, 금제 들의 그물망 역시 만만치는 않다. 그래서 이희중은 언제나 가슴을 떨고, 맥박을 서두르는 고독한 맹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맹수」).
참 오래 썼습니다
한 뼘 되는 가위
지금까지 많은 종이들을 헤어지게 만들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자석이 되었습니다
클립이나 작은 못쯤은 거뜬히 들어올리지요
―「참 오래 쓴 가위」 중에서
표제작인 「참 오래 쓴 가위」는 자르는 역할과 붙이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즉 자르기와 붙이기의 대립적인 의미가 동일한 의미체계에 통합되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이 시집의 단호하고 냉철하면서도 고적하고 쓸쓸한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더불어 만남과 이별, 희망과 좌절, 합일과 배반이 한곳에서 일어나는 우리 삶도 이와 다를 바 없다는 시인의 통찰도 이 시에 드러난다.
이 책에 대하여
어느 날 새색시처럼 다수굿하게 우리들이 사는 전주 화류계로 스며들었던 저 희중이 이제 "여자의 몸을 사랑하고 싱싱한 욕망을 숭상"하는 한편 "건강한 편견을 갖겠다"고 한다. 그의 시쓰기 작업에서도 이른바 말 못 할 석삼년 시집살이가 끝난 것일까? 지난 세월의 자배기에 켜켜이 쌓인 삶의 편린들을 꼼꼼히 살피고 있는 그의 시선은 지금 퍼렇게 날이 서 있다. 나는 그중의 절창 몇 편을, 어느 이성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몰래 뽑아놓는다. 앞으로 내 사랑은 내 주는 사랑을 받아들임에 머뭇거리지 않으리. 이병천(소설가)
가위를 오래 쓰면 자석이 되는구나! 종이를 자르는 기능이 쇠붙이를 끌어모으는 기능으로 일대 전환을 일으키고 있다. 이희중의 시는 얼핏 상처와 맹목으로 이루어진 세상으로부터 나를 단절시키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그것들을 끌어안으며 웃고 있다. 미친 세상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완전한 바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누가 이 완전한 바보의 완전한 경지를 부러워하지 않으랴. 여기 바보가 빙그레 웃고 있어서, 세상의 수많은, 온갖 천재들이 울고 있다. 이문재(시인)
* 2002년 4월 10일 발행/ISBN 89-8281-503-1 02810
* 신사륙판/136쪽/값5,000원
* 담당편집: 김현정, 손미선(927-6790, 내선 217, 212)
세상을 끌어안는 다정한 시편
시의 구성이 긴장감 속에서 전개되고 있지만, 그러나 순백하고 천진스런 정조가 이면에서 배어나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내 안의 어린 아이"의 순정한 정서가 배면의 창작 주체이며 동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인 것으로 해명된다. 홍용희(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