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근대의 풍경, 정갈한 희망의 문맥
『객수산록』은 빈틈없는 지적 언어와 준엄한 산문정신으로 현대사회의 그늘진 이면을 묘파함으로써 독자적인 소설세계를 구축해온 중진작가 김원우가 7년 만에 묶는 신작소설집이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발표한 중단편 5편이 담긴 이번 소설집에는 이미 그 입지가 너무나 척박해져버린 소설이라는 제도로 다시 한번 이 땅의 지적도를 그려보고자 하는 작가의 아픈 결의가 담겨 있다. “근본적으로 엉성할 뿐인 축소판에다 모형물에 지나지 않을 그 불미한 것을 혹시라도 누가 용처에 쓰려고 덤빌 때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지세가 어떻게 바뀌어버렸나 하는 흔적이나마 남기려는”(‘작가의 말’에서) 치열한 작업은 다섯 편의 작품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작가 스스로 “나의 분신”이라 칭한 현대사회의 주변인(난민)들이 처한 곡경과 인간적 허무를 집요하게 따라가며, 궁극엔 명료한 극복의 방향성을 암시하는 “김원우 문학은 한국사회의 근대를 정갈한 희망의 문맥으로 돌려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문학평론가 서경석)
“나그네 세상의 나그네길에는 객수의 휴지가 한순간도 있을 수 없다.”
작가는 단호히 이번 작품집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을 “난민(難民)”이라 이름 붙인다. 그들은 일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거두기 위해 정처를 찾아 끊임없이 서성이는 아픈 생활인이자, 주변인이다. 그들에게 허위와 비속화로 치달아가는 현대사회는 이미 객수(客愁)의 장에 불과하다. 작가는 적확하고 섬세한 언어로 그들의 삶의 세목들을 포착해내고 또 뒤집어 비판하기도 하며 비루한 일상에 드리운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문제화한다.
「반풍토설초(反風土說抄)」는 작가 ‘김 선생’과 시인이자 국어전문 입시학원을 운영했던 ‘나’가 주고받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김 선생의 지인인 일본인 노처녀의 운문사행을 부탁받은 ‘나’는 15평 다세대 주택에 칩거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분별을 지니고 있는 인물 김 선생을 찾아간다. 소설은 김 선생이 풀어놓는 말들을 ‘나’가 다시 반추하는 과정으로 전개되는데, 작가가 둘의 언술과 사유과정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근대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각성이다. ‘근대’라는 것의 옳은 실체가 과연 존재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풍토에서 올바른 의미의 근대소설 쓰기가 과연 가능한가 하는 김 선생의 물음은 작가의 오랜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무병신음기(無病呻吟記)」와 「객수산록(客愁散錄)」은 작가의 문학적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중편소설이다. 「무병신음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본질을 낱낱이 드러내는 작품으로 지방대학의 중년교수를 주요인물로 하고 있다. 세파에 시달려 신음하고 있는 주인공 주변으로는 사기에 휘말려든 아들에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돈을 대며 끙끙거리는 황 노인과 딴살림 차린 남편에게 또 목돈을 날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도씨 부인, 독일 파견 간호원으로 나갔다가 독일인과 결혼해 죽도록 일만 하고 돌아온 처형 등 무병신음족 천지이다. 그들은 그 신고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멀쩡한 육신을 갖고서 생병을 앓고” 있다. 주인공의 처지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의 사유는 조금 더 넓고 깊게 전개된다. “따지고 보면 자식 때문에, 남편 때문에 무병신음들을 한다지만 그 밑바닥에는 여러 제도의 불공정, 불평등, 불합리 같은 것이 암류하고 있어서 포원자들이 끊임없이 속출하게 되어 있다. (……) 그런 시비거리가 몽땅 해소되었다고 해서 과연 앓는 소리가 사라질까.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앓을거리를 쉴새없이 장만하며 살아간다.” 작가는 무병신음이야말로 근대의 한 증상임을 강조하며 다시 한번 우리의 왜곡된 근대성에 비판을 가한다. 그것은 “개인적 생병이라기보다도 일종의 사회적 증후군”으로서의 신음이며, 끝없이 확대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아픈 우리의 현실이다. “제가끔의 주름살들을 맞줄임해버리면 결국 끙끙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살이의 본질적인, 그러나 불가해한 어떤 멍에에 닿는 것인지. 피멍 들게 만드는 그 멍에 때문에 다들 시난고난하는 난민처럼 어디에서든 오막살이 신세를 못 면할지도.”(237쪽)
「객수산록」은 문학평론가 서경석씨의 지적처럼 “작가 특유의 현실분석안이 작동하여 구성해낸 우리 사회의 축도”이다. “주인공이자 명퇴를 기다리는 은행지점장 박덕률, 동상이몽의 자리에 놓인, 작가지망생인 그의 아내 한씨, 박덕률의 모친이자 물장사 밥장사 이력이 있고 여러 남자와 여러 아이를 낳은 엄씨, 그 엄씨를 거쳐간 바로 그 여러 남자들, 박덕률의 친구이자 초발심을 벗어던지고 돈이 세상의 전부가 되어버린 김정두 변호사, 변호사의 소개로 박덕률이 알게 되고 관계까지 맺게 된, 어딘지 들떠 있는 양신옥, 성형외과 의사이자 여성전용병원 원장인 그녀의 바람난 남편, 그의 부지런한 첩 등이 등장하여 우리 사회의 한 풍속도를 그려낸다.” 작가가 지금껏 끈질기게 탐문해온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근대성의 정체와 소외된 난민들의 현실상을 극명하게 형상화함과 동시에, 주인공의 취미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그 극복의 방향성까지 잡아내고 있는 「객수산록」은 “근대 문학자의 성취하지 못한 희망”이 실현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단편 「신종 미개인 일정(日程)」과 「모기 발순(發巡)」은 각각 소설가와 교수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도저한 서사성과 준엄한 현실분석이 돋보이는 중편소설과 달리 은유와 비유를 앞세운 농밀한 묘사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허허실실… 삶의 풍광을 파고드는 빈틈없는 지적언어, 준엄한 산문정신
“언어의 사회적 응전력이라는 화두를 새삼 떠올릴 만큼 문제적인 문체는, 현실을 놓치지 않고 포획하려는 그의 고단한 열정의 산물임은 췌언의 여지가 없다. 특유의 빈틈없는 지적 언어를 구사하며 성취한 작품 세계의 어떤 난해함은 일반 독자들을 당황케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소설계에 대한 방법론적 반성이자,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다. 경박한 국적불명의 문체와 하염없이 사사화되어가는 연성의 문학, 파편적으로 인식하고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풍토에 대한 비판 말이다.”(문학평론가 서경석)
“어떤 환상과도 타협하지 않는 관찰의 기율과 준엄한 도덕적 감각이 결합된 그의 소설은 현대 한국의 시민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적 심성을 옹골차게 해부한다. 범속한 세계의 진실을 추구하는 산문정신이 한국소설에 영속하기를 바라는 독자라면 김원우 소설을 읽고 모두 안도하고 축원할 것이다.”(문학평론가 황종연)
* 2002년 6월 29일 발행 / 4·6양장 / 값 9,500원
* ISBN 89-8281-518-× 03810
* 편집담당 : 김현정, 조연주(927-6790, 내선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