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 저자
- 안이희옥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일
- 2000-10-09
- 사양
- 신국판
- ISBN
- 9788982813276
- 분야
- 장편소설
- 정가
-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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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이 소설은 살아남은 것 자체가 욕이고 분노가 되는 가혹한 성폭력의 경험, 그 토해지지 않는 기억과의 대면이 어떻게 가능한지 심층적으로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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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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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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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리뷰
90년대 초반에 우연히 성폭력 상담소 공개 강의를 듣게 되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처참한 속내 이야기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성폭력은 흔히 생각하듯 "좀 난폭한 성관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혹한 폭력이며 인간 말살 행위였다. 그후 여성운동계의 꾸준하고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되고 수정, 보완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법을 제정하고 규제해도 가해자 남성들이나 일반 여성들은 성폭력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피해자 여성을 서서히 죽여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나쁜 비밀을 갖고 있음으로 해서 대인관계나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는 엄청난 괴로움을 가능한 한 쉽게 형상화하려고 했다. 동시에 성폭력 피해자로만 끝나지 않고 그 피해를 뛰어넘어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나아가 더 이상의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연약하지만 당찬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
이 소설은 이런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씌어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성폭력의 고발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성폭력"의 문제를 통해 주체로서의 여성적 삶을 문제삼고, 그것을 억누르는 사회적 조건을 드러내지만, 폭력을 통해 폭력에 순응해버리는 피해 여성 내부의 심리적 갈등을 깊이 추적함으로써 문제의 다층적 얽힘을 서사화하는 데 이르고 있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것 자체가 욕이고 분노가 되는 가혹한 성폭력의 경험, 그 토해지지 않는 기억과의 대면이 어떻게 가능한지 심층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서른아홉 미혼여성 김현주. 그녀에게는 씻어지지 않는 폭력의 기억이 육체에 각인되어 있다. 열세 살 때, "예쁘장해서 귀여워해"주었다는 의붓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한다. 스물한 살 때, 경찰의 신분을 가장한 두 남자로부터 윤간을 당한다. 그리고 대공과 형사들의 참을 수 없는 언어 폭행이 가해진다.
여기에는 80년대의 억압적 정치 현실이 겹쳐 있다. 일상의 차원에서도 그녀는 넘을 수 없는 벽들과 싸워야 한다. "여성성" "가족" "모성" "순결한 사랑" 등의 바이러스는 모든 사람들을 감염시켜놓았기 때문이다. 김현주에게 청혼하는 최한영은 김현주의 상처를 감싸고 품으려는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그조차도 여성주의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현주에 대해 "페미니즘이라는 신흥 종교를 믿게 내버려두자"는 식의 관용만을 보일 뿐, 남성 중심적 사고의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현주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 걸까.
작가는 성급하게 답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좌절과 분노의 벽에 갇혀버린 한 여성의 고통스런 자기탐문일 뿐이다.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여성 개인의 자리를 그 자체로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여성의 주체적 눈과 언어로 참혹한 질곡의 벽과 마주하기까지, 작가는 김현주로 하여금 스스로 기억의 바닥을 살게 만든다.
일종의 심리분석적 통과제의를 치르게 하는 것인데, 주인공 김현주는 스스로 제의를 집전하고 그 모든 과정을 기록해나간다. 그것은 자신의 언어를 갖기 위한 투쟁의 길이다.
남성 주체의 언어에 자신의 상처와 무의식을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고통의 끝까지 가서 피가 뚝뚝 떨어질 듯한 구체적 서사로 자신의 기억을 소설화하겠다는 주인공의 다짐이 소설의 결미를 이루는 것도 그래서다.
작가 안이희옥 씨는 <또하나의 문화> 편집장을 맡고 있다. 페미니즘은 작가에게 하나의 전략이 아니라 실존 그 자체인 듯하다. "성폭력"은 파괴와 억압의 잔인한 "기억"이지만 작가는 그로부터 희망의 서사를 모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제대로 그 아픔을 "앓고", 그 아픔과 대면한다면 새로운 여성적 주체의 눈뜸이 그로부터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는 점, 작가의 전언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은 살아남은 것 자체가 욕이고 분노가 되는 가혹한 성폭력의 경험,
그 토해지지 않는 기억과의 대면이 어떻게 가능한지 심층적으로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