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소설가 윤후명의 백 가지 꽃 이야기
시인이자 소설가 윤후명이 백여 가지의 꽃·나무에 얽힌 사연을 엮은 산문집 『꽃』을 펴냈다. 그 동안 그의 소설 곳곳에 등장해 저마다 아름다운 문장을 이루어냈던 꽃과 나무에 대한 묘사들은 저절로 나온 게 아니다. 저자 스스로 "꽃에 바친 시간은 참으로 길다. 태어나면서부터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인데, 그럴 수 없으니 철들면서부터라고 말한다"라고 고백할 만큼 꽃에 대한 저자의 사랑은 깊다. 학창 시절 그는 문예반이 아닌 원예반 소속이었고, 그의 꿈은 시인·소설가가 아닌 식물학자였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본격적으로 쓴 것만도 삼 년이 넘을 만큼, 저자가 꽃과 나무들을 곁에 두고 사귀면서 오래 전부터 꾸준히 써온 글이다.
"이 글은 식물에 경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내 뜻의 소산이다. 꽃의 빛깔, 향기, 모습에 황홀하다. 꽃은 우리를 뇌쇄시키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눈물겨운 몸짓이다. 그 몸짓에서 삶을 얻고 위안을 얻는 우리는 꽃을 최상에 두고 경배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함으로써 식물에 진 빚을 티끌만치라도 갚을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 - 작가의 말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에 나는 꽃, 개나리 철쭉 동백 등 잘 알려진 것부터 참배암차즈기 놋젓가락나물 란타나 등 생소한 이름의 꽃까지 두루 살피는 저자의 눈은 사려 깊고 고요하며 은은하면서 향기롭다.
꽃…… 그 원초적인 황홀함에 취하다
노루귀, 복수초, 크로커스, 금낭화, 미나리아재비, 천남성, 상사화, 꿩의다리, 여뀌, 누리장나무, 아이비 덩굴, 제라늄, 꽃무릇…… 이 책에서 언급한 꽃·나무를 꼽으려면 백 가지가 넘는다.
봄 가장 먼저 피는 봄꽃을 일러주는 것에서 시작해 저자는 전남 광양 섬진강가에서 열리는 매화 축제와 구례 산동의 산수유 축제에서의 감동을 전하고, 야생화 처녀치마 이름의 기원, 시베리아무릇에서부터 시작된 협궤열차의 추억, 며느리밥풀꽃이라고 알려진 금낭화에 얽힌 전설을 들려준다. 또한 「헌화가」에 나타난 철쭉, 마호메트가 좋아했던 수선화, 개불알꽃·거지덩굴·노루오줌·뚱딴지·말오줌나무·며느리밑씻개·소경불알·큰도둑놈의갈고리 등 발음하기 거북한 우리 꽃들을 소개한다.
여름 꽃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고 똥나무라 이름붙여진 만리향, 너무 넉넉하고 친근해서 박색이 되어버린 호박꽃, 잎과 꽃이 서로를 보지 못해 그리워한다는 상사화, 남녀의 금실이 합쳐지는 합환의 꽃이 피는 자귀나무 등 여름 꽃·나무들을 소개하는 저자는 백두산에서 보았던 화려한 꽃들과, 감자꽃과 함께 자라고 감자 몇 알로 끼니를 때우던 어린 시절, 보랏빛 도라지꽃 부케를 든 신부와 결혼식 올렸던 사연을 아련한 감동으로 떠올린다.
가을 가을 중앙아시아 길가에서 본 해라바기, 저자에게 영검을 불어넣는 엄나무, 남색의 깊고 아름다운 쪽빛에 얽힌 한창기 사장과의 만남…… 가을꽃을 떠올리는 저자에게 이름 모를 잡초 속으로 옛 소녀의 모습이 그려지고 감나무에서는 고향 냄새가 난다.
겨울 겨울의 추위에 준비해 잎을 여닫는 꽃들이 있는가 하면, 겨울에 더 푸르른 꽃무릇과 석창포 등도 있다. <세한도> 속의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늠연하고 올곧은 나무도 있다. 저자는 강릉 바닷가에서 열린 천도재에서 떠나보낸 겨우살이, 단지 동백꽃을 보고자 떠났던 여행, 보졸레 누보와 함께 즐겼던 제라늄 등을 회상하며 봄을, 꽃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꽃』을 보다보면 우리 시(詩)에 이토록 많은 꽃들이 등장했었나 싶다. 저자는 시에 대한 사랑을 꽃에 이입시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인연설화조」(서정주), 「복단여정」(박목월)의 모란, 「4월의 노래」(박목월)의 목련, 「사랑하고 싶은 날」(오탁번)의 앵두나무, 「상주 모심기노래」의 연(蓮), 「국화 옆에서」(서정주)의 국화 등 시를 통해서 되새기는 꽃 더욱 향기롭다.
저자의 글에 따르면 서울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봄꽃은 노루귀다. 겨울의 오랜 침묵을 뚫고 마악 가냘픈 꽃대를 뽑아올리는 하얀꽃 연분홍꽃 연보라꽃. 저자의 기다림이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봄은 그렇게 온다.
*2003년 3월 3일 발행
*ISBN 89-8281-633-X 03810
*국판 변형/296쪽/값 8,500원
*담당편집: 장한맘(927-6790, 내선 202)
꽃... 그 원초적인 황홀함에 취하다
꽃은 역시 문장가를 만나야 숨겨두었던 향기를 드러내고, 문장가는 꽃을 만나야 글이 더 그윽해지는 모양이다. 은은한 미문은 때로 고아(古雅)한 풍류의 멋을 지니고 읽는 이를 취하게 한다. 그러니 이 꽃 이야기를 삼매 속에서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 - 최승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