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우주의 본질에 대한 심오하고 방대한 사유
자신의 일관된 화두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탐구하며 통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소설세계를 구축해온 박상륭의 신작 소설집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이하 『잠의 열매...』)가 출간되었다. 소설집으로는 『평심』(1999) 이후 네번째이다. 동서고금의 종교의 벽을 넘나드는 사유체계, 즉 선불교의 견성·돈오, 기독교의 자기 희생·자기 구원, 연금술의 제금술, 신비주의의 집단무의식, 주역의 세계 인식은 자유자재로, 변함없이 그의 작품 속에서 활개치고 있다.
이 소설집은 박상륭 문학에서 밖으로 나오는 문이자, 다시 박상륭 문학의 처음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그의 문학의 영토와 시간대는 웅장하고 또 웅숭깊다. 기독교에서 티벳 불교까지, 신화에서 서구 문명의 최근까지를 가로지르며 몸과 말, 말과 맘(마음)을 아우르는 그의 문학의 고고학은 고현학과 겹쳐져 있다.
연구와 어론이 법으로 빛나고 있으니, 종교 사상 예술 문학을 뛰어넘은 전혀 새로운 사유와 언어의 향연이 여기 있다. 뛰어난 작가는 평생 한(一/大) 작품을 쓰거니와, 그 작품은 우주를 앓으면서, 우주의 앓음다움(아름다움)을 탄생시킨다. 우주적 방언으로 방언들의 우주를 뒤엎으며 새로운 우주를 짓는 것이다. 이문재(시인)
해독되지 않는 아름다움, 매혹적인 경전
데뷔작 「아겔다마」에서부터 줄기차게 인간 존재의 문제를 죽음의 관점에서 탐구해온 박상륭의 『잠의 열매...』는, 거대하고 드높은 박상륭 문학의 ‘새로운 지도’라 평가받은 바 있는 『평심』 이후 삼 년 만에 내놓는 작가의 네번째 소설집이다. 「두 집 사이」 연작 네 편과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연작 네 편, 그리고 「영합(迎合)이냐, 순제(殉祭)냐」 「순제(殉祭)냐, 순난(殉難)이냐 」 등 총 열 편이 실린 이 소설집에서 역시 박상륭 문학의 진면목은 그 빛을 잃지 않는다.
한 노인네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행하는 몽상과 상념으로 이루어진 「두 집 사이」연작에서, 그 몽상과 상념이라는 것은 박상륭 문학의 핵심적 주제인 ‘전체에의 체험’ 혹은 ‘무(無)에의 긍정적 체험’의 전개에 다름아니며, 「混紡된 상상력의 한 형태」 연작 역시 제목에서 이야기하는바, 동화(童話)에서 신화(神話)로, 풍문(風聞)에서 현실(現實)로, 相에서 性으로, 우화(寓話)에서 천기(天機)로 이어지는, 혹은 넘나드는, 아우르는, 그 무엇이다.
박상륭의 소설은 종교와 신화가, 거기에 다시 동화와 현실이 섞여들듯, 말 자체가 하나로 묶인다. 그의 소설에서는 몸과 말과 맘이 하나로(뫎), 장소와 사물이 하나로(고 ), 고통(앓음)과 아름다움이 하나로(앓음다움) 엮인다. 이러한 기호들을 비롯한 해독하기 힘든 그의 작품은 그러나, 아름답고 넓어, 우주를 품고도, 우주를 낳고도 남는다.
박상륭 문학이 제시하고 있는 비전은 매혹적이다. 그것은 죽음의 길, 그 고통스럽고 참혹하며 낭자한 ‘몸’과 ‘말씀’의 길이지만, 그의 문학은 기어코 삶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끌어안는다. 삶과 삶의 터전인 이 대지는, 죽음을 선고받은 처형지, 다시 말해 성욕(창조력)과 죽음(파괴력)의 길항인 ‘상극적 질서’의 격전장이 아니라, 생명을 축복하고 사랑을 찬미하는 존엄성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고뇌의 뿌리인 육신이 다름아닌 신생의 자궁이 된다는 인식이다. 그의 문학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인간에게 던져진 이 유일한 가능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인 것이다.
小說하기의 앓음다움, 소설 읽기의 앓음다움!
작가에게 小說하기가 앓음다운 만큼 그의 소설은 읽기(혹은 읽어내기) 역시 앓음답다. 종교와 신화를 아우르는 우주적인 상상력, 그 장대한 스케일, 생명과 존재의 비의를 파고드는 치밀한 사유와 논리, 그리고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고 정확한 그의 문체는 읽어내기조차 쉽지가 않지만, 그의 소설, 기호와 글자들, 그리고 행간을 읽어내려 애쓰는 동안 어느새 독자는 그의 소설 속에 흠뻑 젖어들게 된다.
박상륭에게 소설은 여러 이질적인 담론들이 공존하는 ‘잡설(雜說)’이다. 여기서 잡설이란 이야기 내용의 잡스러움과 또한 이야기를 하는 방법의 잡스러움을 모두 뜻한다. 하나의 이야기에 여러 다른 이야기들이 마구 끼어든다. 때로 끼어든 이야기들이 주이야기를 훨씬 능가한다. 그 여담들은 소설에 관한 메타적인 담론, 종교적 담론, 혹은 의학적 담론 등으로 그 종류도 다양하다. 여담이 끼어드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것은 괄호의 사용인데 한 문장 속에 중괄호 대괄호를 겹쳐놓기도 하는 이러한 장치는 작가의 말을 자연스럽게 한 분야에서 그것을 보충한다는 구실하에 다른 담론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그러나 문제는 한 소설 속에 여러 담론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질적인 담론들이 아무 거침없이 서로 뒤엉켜 있다는 점이다. 그의 말의 배설물들은 독자들을 당황하게 할 만큼 낯설고 기이하다. 그것은 소설적 서사가 갖는 일상적인 상상력의 경계를 파괴한다.
무너져버린 상상력의 경계, 동화와 신화, 풍문과 현실, 우화와 천기로 이어지고 뛰어넘는, 작가의 小說하기만큼이나 앓음다운 그의 小說을 읽는 즐거움은 역시 그 상상을 뛰어넘는다.
*초판 발행/ 2002년 7월 29일
*ISBN/89-8281-542-2 03810
*사륙판/ 280쪽/값 8,5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조연주(927-6790, 내선 204,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