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성폭력, 더 이상 쉬쉬하지 마세요!
유치원에 다니는 브리트는 동물 인형에게 말을 건네고, 수프를 끓여 주는 천진난만한 아이이다. 하지만 브리트에게는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비밀이 하나 있다. 의붓아버지로부터 끊임없이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말 못 하는 동물 인형 란돌린은 브리트의 아픔을 지켜보다 못해 "번쩍 하는 순간" 외치게 된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돼! 누구도, 누구도, 그 누구도 너에게 그래서는 안 돼! 넌 인형이 아냐! 넌 껴안고 부비라고 있는 게 아냐. 나쁜 비밀은 털어놓아야 해. 그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도움이 필요해!"
브리트는 동물 인형 란돌린의 충고에 용기를 얻어 이웃집 프레리히 아줌마를 찾아간다. 귀기울여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믿음직한 아줌마에게 브리트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마침내 아줌마는 전문기관에 도움을 청하고 브리트는 오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브리트와 같은 아이들은 얼마나 될까?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브리트처럼 아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한 어린이는 80%를 웃돈다(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자료 2002년 10월). 그 중 친족에 의한 범죄 행위가 36.3%이다. 이는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아동 성폭력 상담 사례를 조사, 공개한 결과와도 거의 동일하다. 어린이 성폭력은 다른 범죄와는 달리 잘 아는 사람에 의해서, 잘 아는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한 번에 그친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학대 행위가 가해지는 경우도 절반이 넘는다. 어린이 성폭력에 있어서는 안전한 사람도, 안전 지대도 없다는 말이다.
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성폭력 피해 사례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그에 따라 전문상담기관이나 신고기관도 증가 추세에 있으며,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법안을 개선시키려는 시민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성폭력을 당한 어린이들은 자신이 당한 피해가 성폭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가해자가 비밀로 하라고 협박하기 때문에 피해 사실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 가족 대부분은 브리트처럼 두려움에 떨며 비밀을 은폐하고,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어두운 그늘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문제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있어야 한다. 물론 주위 사람들의 도움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린이 성폭력을 정면으로 다룬 첫 책!
성폭력 피해 어린이는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정신적·성적·육체적 후유증에 시달리며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사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이들 중 많은 수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시도한다. 더구나 사회의 오해와 잘못된 법 제도 아래서(피해 어린이의 진술을 반복하게 하는 수사 관행, 어린이를 법정에 세우는 증인신문제도 등)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어야 하며, 가해자 응징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어린이 성폭력이 한 어린이의 장래와 사회에 미치는 파장과 심각성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올바른 성 지식과 성폭력 가해·피해 예방 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교육 현장에서 마땅히 활용할 만한 성폭력 예방 교재가 없는 시점에서 작년 말 성폭력 피해자 의료 지원 기관인 ´한국성폭력예방센터´에서 초등학생 대상의 성폭력 예방 CD가 나왔고, 인형극을 통해 성폭력 예방 교육이 이뤄지고 있으며, 부모를 위한 심포지엄이나 예방 교육프로그램이 각 성폭력 상담기관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성폭력특별법이 없던 90년대 중반 이전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그러나 어느 신문 조사 결과 성을 주제로 한 책 가운데 유아들이 부모와 함께 읽을 만한 책은 열 권 남짓에 불과했다. 그 대부분은 생명 탄생의 과정이나(『내 동생이 태어났어』, 비룡소;『아가야, 안녕?』, 사계절;『쉿! 엄마 뱃속에 동생이 들었어요』, 대원 주니어; 『엄마가 알을 낳았대』, 보림), 성별 차이에 대해 알려 주는(『나는 여자 내 동생은 남자』, 비룡소) 『이상한 곳에 털이 났어요』, 여명미디어) 것이었으며, 성폭력 예방을 다룬 책은 『이럴 땐 싫다고 말해요』(문학동네어린이)가 유일했다.
어린이를 위한 올바른 성교육의 필요성은 절감하면서도 다루기 까다롭고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의 민감성 때문에 성폭력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은 한 권도 찾아볼 수 없다. 『슬픈 란돌린』은 쉬쉬하고 덮어두었던 성폭력에 대해 그 실체와 해결 방법까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부모들이 아이에게 직접 말하기 힘든 사실들을 이야기와 그림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브리트의 처지와 아픔을 함께 느끼고, 브리트와 같은 고통을 겪는 아이들에겐 혼자 고민하며 떨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당당하게 문제를 풀어나가라고 이 책은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는 한국이웃사랑회나 한국어린이보호재단, 아동 상담소, 성폭력피해 상담소 등 각 지방에 소재한 전문 기관의 홈페이지와 연락처를 실어 실제로 도움이 되게 했다.
어린이 성폭력 예방에 도움을 주는 책!
이 그림책과 문학동네 어린이의 성폭력 예방 지침서인 『이럴 땐 싫다고 말해요』의 수익금 중 일부는 ´아동성폭력피해자가족모임(대표 송영옥)´의 기금으로 쓰여지게 될 것이다. "아동성폭력피해자가족모임은 2001년 10월 15일 아동성폭력 피해자들이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으자는 취지로 결성됐다. 이들은 2001년 11월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처음 항의 집회를 가진데 이어 ´피해아동의 법정출두진술거부´, ´아동성폭력피해자의 친권자 증거보전청구권인정´, ´성폭력 범죄자에 한해서는 형법상 미성년자 연령 10세 이하로 인하´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꾸준히 가져왔다. 그 동안 150여 명의 피해가족들이 모임을 거쳐갔고 현재 활동중인 가족들은 40여 명(이상 문화일보, 2003년, 1월 4일)"으로, 후원금이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린이 아네테 블라이
1967년 로이틀링겐에서 태어났다. 미국과 독일 만하임에서 인쇄 예술과 회화를 공부하였고, 지금은 마드리드에 살면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책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린 책으로 『멜빈의 별』 『소피아와 오싹 유령』 『미미와 올리에게 일어난 일』 등이 있다.
옮긴이 허수경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와 장편소설 『모래도시』,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펴냈다. 2001년 제14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한 뒤 지금은 뮌스터 대학에서 고대 동방고고학 박사 과정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