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동하는 김형수가 첫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를 출간했다. 1996년 처음 소설을 발표한 후 6년 만에 묶는 이 소설집에는 여섯 편의 중단편 소설들이 실려 있다. 지나가버린 청춘, 가슴 저미는 실패와 좌절과 회한과 그리움을 이야기하는 소설집 전편에는 저자의 타고난 입담과 더불어 잊혀져간 것들을 더듬는 야무지고 정갈한 눈길이 가득하다. 군대와 장터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튀어나오는 인물들의 솔직담백한 대화들이 묘한 페이소스를 유발하는 것은 이 때문일 터.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를 너무 앙물어서 아프다, 라고 말하고 있다. 내면에서 오랫동안 숨쉬어오던 소설들을, 버려지고 지나버린 것들에 대한 애정들을, 정 많고 눈물 많은 인물들을, 감추고만 있었던 회환의 정조들을 내놓느라 저자는 출산의 고통을 앓았으리라. "오늘, 내 나이 마흔 살이 되었다. 아, 슬프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길을 지나쳐버렸다."
앞질러가는 21세기를 뒷걸음치는 경쾌한 순정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서영채(한신대 교수)는 김형수의 소설에서 특이한 인물들의 삶이 뿜어내는 활기와, 소설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풍부한 서정성을 특징으로 지적한다. 그가 보여주는 활기는 「구름의 파수병」 연작에서는 군대를 배경으로, 「나뭇잎 옷을 입은 거짓말쟁이」 「겨울귀(鬼)」 등에서는 밀래미 장터를 배경으로 드러난다.
「구름의 파수병」 연작은 꼴리니라는 별명을 가진 선상병, 연좌제에 걸려 철책 근무도 못 하고 전방 사단에서 예비훈련만 받아야 하는 딱한 사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과부촌에 가고 싶다! 하루라도 좋으니 과부촌에서 자고 싶다!" 첫 부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연작은 과부촌을 꿈꾸는 군인들의 이야기인데, 「구름의 파수병·하나」에서 최전방 철책 밑에 존재한다는 과부촌을 향한 군인들의 열망과 이에 따른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면, 「구름의 파수병·둘」에서는 과부촌의 실상과 그곳을 방문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린다. 과부촌은 성적 분출의 장소가 아니라, 여자들만 남을 수밖에 없는, 과거 인민군 마을이었던 것. 결국 소설은 꼴리니 선상병의 죽음으로 끝을 맺지만, 한때 젊은 시절을 사로잡았던 꿈·선상병과 나의 유대감 등은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뛰어넘어 깊이 있는 회상의 무게로 다가온다.
표제작인 「그 이발소에 두고 온 시」는 군대 이야기도 고향 이야기도 아니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남자가 마흔번째 생일을 맞는 날, 느닷없이 주례를 맡아달라는 후배의 부탁에 담양 땅 관방천변을 방문하게 된다. 그곳은 15년 전, 그가 두세 달을 머물렀던 곳이요, 여자 주인공 희순이 남편과 함께 이발소를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다. 15년 전, 남자와 여자는 두 달 동안 연인 사이였으나 남자의 옛 연인이 찾아옴으로써 둘의 사랑은 끝나고 만다. 이러한 한때의 추억을 바탕으로 소설에서는 남자와 여자 각각의 시선으로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여자는 자신이 평생 기다려온 남자의 뒷모습을 첫눈에 알아보고, 남자는 관방천변을 걸으며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묻어놓았던 기억을 아주 어렵게 끄집어내는데…… 결국 둘은 이발소 안에서 손님과 아줌마 면도사로 맞닥뜨리고 만다.
「나뭇잎 옷을 입은 거짓말쟁이」는 밀래미 장터의 대표적인 안거서공(앉으면 거짓말 서면 공갈) 리감초의 능청맞은 선거 이야기다. 외삼촌의 연락을 받고 급히 밀래미 장터로 내려간 주인공이 장난삼아 바꾼 애물딴지 대통령 시계가 리감초의 손에서 시가 십수만원대를 웃도는 애국자표 대통령 하사품이 되는 일화로 시작되는 이 중편은 장터와 장터 사람들의 생래를 활기차고 우스꽝스럽고 호들갑스러우면서도 청승맞게 표현한다. 낄 데 안 낄 데 안 가리며 잇속을 챙기면서도 놀라운 친화력과 무지막지한 과장법으로 뒤탈을 남기지 않는 수완가요, 한번 마음먹은 일은 악착스럽게 관철해내는 독한 근성의 소유자인 리감초 등의 인물 묘사와 "이웃한 농민들로부터 장것들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그러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촌것들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의 공간, 어떤 교양어도 대적할 수 없는 고단위 능청과 말 휘갑의 장터 언어로 엮어진 사람들의 공간, 서로 잡아먹을 듯 앙앙불락하면서도 어떤 결정적인 대목에 가서는 한꺼번에 휘휘 풀어져버리는" 원색적이고도 노골적인, 그래서 매력적인 장터라는 공간은 저자의 애정 어린 시선을 통해 더없이 따뜻한 온기로 다가온다.
그 밖에 등단작인 「들국화 진 다음」은 호스티스인 국희를 향한 노총각 주인공의 애달픈 사랑이 국희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인해 좌절되는 과정을 그려 강한 페이소스를 남기며, 「겨울귀」는 아버지를 닮아 아잇적부터 알코올 중독에 빠진, 병득의 삶을 따뜻한 애정을 담아 서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장터에서의 삶이나 첫사랑의 추억이나, 『이발소에 두고 온 시』에는 이렇게 잊혀져가는 그리운 것들이 소설 전면에든 혹은 작품을 감싸안는 한 배경으로든 강한 정서와 그리움을 호소하면서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이 독특하고도 새로운 소설적 기법으로 다가오는 것은 인물들의 혈기왕성하고 능청스런 활기와 부드럽게 어우러져 있는 까닭일 것이다.
*2003년 4월 23일 발행
*ISBN 89-8281-634-8 03810
*신국판/312쪽/값 8,500원
*담당편집: 장한맘(927-6790, 내선 202)
사위어가는 젊은 날……
빛 바랜 풍경을 더듬는 경쾌한 순정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엮어가는 쟁이 기질과 타고난 입담, 요즘 세상에서 쓸모 없이 버려진 것들에 대한 살가운 애정……단언하건대 요 근래에 이렇듯 소설이라는 공간 속에 매료되어 깊이 빨려들어간 것은 처음일 터이다.--송기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