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리 50년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미군 사격장 반대 투쟁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그리운 매화 향기』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동화 작가 장주식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2001년 『그리운 매화 향기』로 제2회 어린이문학상(어린이문학협회의 주관)을 수상했던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작품을 발표했다. 이전 작품이 굵직한 서사 구조를 갖춘 소년소설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다양한 인물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 짧은 호흡의 단편 동화집이다. 하지만 새 작품 『깡패 진희』에서도, 어린이들의 관심을 가족과 학교를 넘어 사회 여러 계층으로 넓히려는 작가의 노력과 소외된 이웃들의 삶을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진지하고 따뜻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세상 모퉁이에서 저마다 진솔한 삶을 꾸려 가는 사람들
작가는 이 책의 주인공들이 "세상의 중심에서 약간 밀려난 듯한" 이들이라고 털어놓는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이들,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삶의 뒤안으로 밀려난 할머니 할아버지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임을 다하며 고집스럽게 생을 꾸려 가는 사람들, 그리고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이 땅에서 사라져 가는 동물들까지…….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 시대의 주인공들은 아니지만, 저마다 자기 삶에서만큼은 엑스트라가 아닌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 가는 이웃들. 그들이 들려 주는 소박하고 진솔한 이야기 7편이 『깡패 진희』에 실려 있다.
표제작 「깡패 진희」는 엄마 없이 아빠와 할머니, 어린 동생과 살고 있는 6학년 여자 아이 진희의 이야기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고 누구보다 밝고 씩씩하게 살아 가는 진희의 별명은 깡패다. 말 안 듣는 동생도 진희 앞에서는 고분고분, 웬만한 남자 아이들도 진희의 주먹 앞에선 꼼짝 못 한다. 하지만 왜 깡패 진희라고 엄마 품이 그립지 않겠는가. 2년 만에 처음으로 "나도 엄마랑 같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는 진희는 스스로 무너진 가족을 일으켜 나간다. 엄마를 때리지 않겠다는 아빠의 각서를 들고 찾아간 진희에게 엄마는 아빠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다. 엄마의 전갈에 부드럽게 그러마 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느낌이 딱 왔다"는 진희. 진희의 예감은 과연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엄마 아빠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열세 살 진희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긴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와 그림
그밖에도 『깡패 진희』에는 마당에 나타난 두더지 때문에 생긴 소동을 어린 화자의 눈으로 묘사한 「두더지」, 신발도 양말도 신지 않고 날마다 운동장을 달리는 아이의 사연을 담은 「맨발 철규」, 할머니의 정겹고 애틋한 사랑이 묻어나는 「할머니와 벽오동」「할머니의 증명사진」, 그리고 상인들의 생생한 삶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삼백 아지매네 묵 맛」 「천서리 이광정 막국수」가 실려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오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살고 있는 작가의 생생한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 시골 마을과 장터에서 만나는 이웃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그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2년 간의 시골 생활이 작가에게 다채로운 글감을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삽화가 또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시골 생활이 그림을 그리는 데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따뜻한 색연필 질감과 개성 있는 기법으로 시골의 풍경과 할머니들, 정겨운 이웃들, 그리고 꾸밈 없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잔잔하게 전하고 있다. 깊어 가는 가을에, 따뜻한 느낌의 초콜릿색 그림은 어린이들에게 긴 여운과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