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
- 저자
- 박상륭
- 출판사
- 문학동네
- 발행일
- 2003-06-23
- 사양
- 408쪽 | 사륙판 양장
- ISBN
- 89-8281-680-1
- 분야
- 장편소설
- 정가
-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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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소설문학의 준령 박상륭, 그가 십 년 만에 큰 숨을 토해낸다
니체와 그의 차라투스트라에 보내는 강력한 도전장! 그가 벌이는 유령과의 싸움, 이 끔찍스런 배밀이, 저 존재의 바깥을 한 뼘 한 뼘 깨쳐나가기 위한 눈물겨운 헌신의 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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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상륭
1940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경희대 정외과에서 수학했다. 1963년 성경의 유다 모티프를 도전적으로 재해석한 단편 「아겔다마」로 『사상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그는 1973년 『죽음의 한 연구』를 발표한 이후 이십여 년간 『칠조어론』 집필에 전념하면서 인간 존재의 문제를 죽음과 재생의 측면에서 탐사해왔다. 그의 문학은 동서고금의 종교 신화 철학을 아우르는 심오하고도 방대한 사유체계와 우주적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거대한 스케일, 그리고 독보적인 문체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광대한 차원으로 확장시켜왔다.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소설집 『열명길』 『아겔다마』 『평심』 『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 산문집 『산해기』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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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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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리뷰
소설문학의 준령 박상륭, 그가 십 년 만에 큰 숨을 토해낸다
자신의 일관된 화두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탐구하며 통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소설세계를 구축해온 박상륭이 이번에는 니체와 그의 차라투스트라와 한판 대결을 펼친다. 『칠조어론』 이후 십 년 만의 장편소설인 『神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는 니체에 대한 도전장에 다름아니다.
미적 사유의 극한에서 탄생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이번에는 박상륭이 창조한 종교적 삶의 세계로 자리를 옮긴다. 박상륭이 자유자재로 해석한 차라투스트라의 사상을 니체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니체는 자기 사상의 미래의 운명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박상륭도 자신의 차라투스트라가 니체의 너머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건 이 맞대결은 숙명적인 것이었다.--김재인(문학평론가)
소설은 니체의 그것에서처럼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되어 한 늙은 성자를 만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서른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 고향과 고향 호수를 버리고 산으로 갔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정신과 자신의 고독을 즐겼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마음이 변했으니 (……) 나는 너처럼 아래로 내려가야(untergehen)만 한다. 내가 가고자 하는 아래쪽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 보아라! 이 잔은 다시 비고자 하고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다. ―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내려옴(Untergang)은 시작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소설은 전체적으로 니체의 텍스트와 유사한 서사구조 위에서 전개된다. 니체의 그것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소설 역시 주인공 차라투스트라의 하산으로 사건이 시작되고 있고, 주인공과 한 늙은 성자(기독교도)와의 만남과 대화를 중요한 서사적 요인으로 채택하고 있다.
(……) 보라! 이 술잔은 다시금 빈잔이 되려고 하며,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다시금 인간이 되려고 하는도다!
차라투스트라는, 부르짖듯 그렇게 말하고, 세월 탓일 것이고, 또 그러는 동안, 쌓이게 된 지혜의 먼지에 덮인 탓일 것으로, 흐리게 된 눈, 어죽은 삭신으로, 제각각 저에게 편한 자리를 찾아, 끌박히듯 웅숭크리거나 똬리쳐 있는, 자기의 독수리와 뱀을 건너다보며, 마음으로, 눈으로, 하직을 고했다. (……) 새는 그리고, 비척이며 산을 내리는 차라투스트라 자기의 오랜 친구에게도, 모든 유정에게와 꼭 같은, 그런 공평한 눈길을 보냈다. (……) 허연, 늙은네 하나가, 지팡이에 의지해 서서. 손짓해 부르고 있음을 보았다.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에서
그러나 이 모든 서사구조와 소설적 모티프들은 니체의 그것과는 전혀 상반된 함의를 갖는, 의미상의 철저한 변용과 전복의 과정을 거쳐 채택된 것들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의 주인공의 하산행위는 니체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후자의 하산이 초인적 경지에 대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몸소 실천하고 뭇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펼치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전자의 그것은 기왕의 자신의 신념을 반성하고 재점검한 결과로서의 입장 수정 혹은 입장 철회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니체의 텍스트에서는 거의 침묵한 채로 차라투스트라에게 경멸당하던 기독교도 늙은 성자는, 이 소설에서는 2장(차라투스트라에게 답答한다) 전체에 걸쳐 차라투스트라에게 조목조목 반격하고 있다. 이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늙은 성자의 말이야말로 박상륭이 하고자 하는 그것에 다름아닐 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읽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박상륭의 해석 읽기,
박상륭이 창조한 새 차라투스트라 읽기!
언급했듯이, 2장 차라투스트라에게 답答한다는 차라투스트라의 물음에 대한 늙은 성자의 답이 아니다. 그것은 기실, 니체와 그의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박상륭과 그의 차라투스트라의 도전이며 질문이며 또한 그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다. 다음의 말은 어쩌면 이 소설에서 박상륭의 늙은네, 곧 박상륭의 차라투스트라가 이 소설에서 펼쳐 보이려는 그의 또 한 세계가 아닐지.
(……) 문제는 그런데, 이 늙은네께는 아무래도, 차라투스트라가 재편집한, 신들의 궤멸에 대한 서사시가, 어떻게도 동의할 수 없이 이뤄진 것이나 아닌가, 하는 데 있소이다. 그것은 매우 동화적으로, 좀더 솔직한 말로 바꾸면, 아동용 희극에나 써먹힌대도 여전히 부족하게 이뤄져 있어 보이는데, 유일신은 ‘유일신론’을 부르짖기로, 신으로서 할 수 없는 발언을 했기에 의해, 그 당장 대가리가 떨어져 죽고, 다른 제신諸神은, 그의 희극적 언사 탓에 웃다가 펴져 누웠다는 게, 그 서사시의 내용이 아닙뎌? (……) 차라투스트라의 서사시는, 매우 안됐게도, 하나의 우주적 오류 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지적해드렸으면 합네다. 그것이란, 차라투스트라는, 말한 바의 저 ‘유일신’도, 다른 ‘다신多神’들과 비슷한 신격으로 이해하여, 함께 싸잡아 취급했다는 그것인데,― 이건 조금이라도 생각이나 관심이 있는 이라면, 대개들 알고 있는 얘기를 빌려 쓰는 소리외다만,―‘다른 제신은 모두, 그들의 모태母胎나 강보를 자연自然에 두고 태어났음에 반하여, 이 특정한 유일신은 자존자自存者며, 결코 자연의 어떤 초력 의신화擬神化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문화적文化的인 신’이라는 것, 그런즉 모태나 강보 따위가 아예 거론될 여지가 없음인 것. 그러므로 해서 그는, 당연하고도 당당하게 ‘신은 하나뿐이다!’라고, 자기의 변별성을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외다. 그것이 어째 웃음거리일 수 있으며, 어째 ‘신답지 않은 발언’이라고 할 수 있겠소이까? (……) 슬픈 것은, 그렇게 선언 설파했던 이는, 인간도人間道에서 신을 잃고, 축생도, 또는 ‘몸의 우주’에 가서, 신을 찾고 있더라는 그것이외다. ‘초인’의 상정은, 일러서들 말하는 바대로, 그런 뒤 부정적으로 야기될 ‘무신주의無神主義에의 한 대안’이었던 듯한데, 그러나 노예근성의 종말인들에 대하여 ‘초인의 사상’은, 초식동물草食動物들께 주어진 육미肉味나 같은 것 말고 무엇이겠소? (……) 물론 차라투스트라는, 어쩌면(이란, 이것에 대한 공의 설교는 가장 애매모호하여, 무봉천의모양, 보이기에 아름답되, 어디를 잡아 열어, 그 천의의 알몸을 보듬어낼지, 알 수가 없어 하는 말인데,) ‘모래시계’를 관찰하고, 그것을 우주의 시간을 이해하는 척도로 삼은 듯하다는 짐작은 있소이다만, 그것의 극복으로써 ‘영겁회귀eternal recurrence’를 설했음도 짐작 못 할 바도 아닌가 하외다. 소박한 눈으로, ‘모래시계’의 시간을 관찰한다면, ‘시간의 현재’가 태어나는 자리에서 보면, 영겁으로 놓여진 길은 두 갈래인 것처럼 보일 테요. 하나는, 영겁의 과거로, 하나는 영겁의 미래로-. 모래시계 속의 시간의 운행을,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지 않고, 허심탄회한 눈으로 들여다본다면, 저 ‘고정관념’이 뜻하는 것과 같은 ‘시간의 미래’란, ‘시간의 과거’의 집적이, (모래시계의 뒤집힘에 의해) 재유출되는 것이어서, ‘시간의 과거’의 재유입일 뿐, 거기 ‘시간의 미래’가 상정될 자리는 없는 것이겠지요? 거기 시간의 직선성이 운위될 여지도 있어 뵙네다. 이것은, 밀종파에서 관하고 있는 바의, ‘바르도↔역逆바르도’와 같은 관계일 터이지만, 양자의 같지 않음은 전자는, 같은 순간들의 되풀이라고 이해됨에 반해, 후자도, 윤회하되, 그 윤회는 언제나 다른 형태를 드러낸다는 것, 같은 것일 거외다. (.....) ‘회귀’의 시간이란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공의 회귀는, 늙은네가 이해하는 것과 매우 다른 것이라 한다 해도, 시간과의 관계에서 운위되는 회귀란, 소박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될 것이외다. 허무주의에의 극복으로써 설해진 것이 ‘회귀’설이라면, 그것은 허무의 심연을 더 깊이 파는 결과밖에 안 될 터이외다. (......)이런 주제는, 더 많이 얘기하면 할수록, 장황해지기는커녕, 그 모습이 더 확연해지는 것일 것임에도, 불학의 촌로는, 이만큼만 얘기하는 것이, 공에 대한 예의일 듯싶소이다. 공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고려하시고, 늙은네는, ‘영겁회귀’를, 다른 방언의 ‘윤회론’처럼만 이해하고 싶어하여, 그런 고전적 태도를 고수하려 한다고 알아주셨으면 싶소이다. 그런 이유로, 공의 ‘영겁회귀’란, 희망이나 사상 같은 것이기보다는, 일종의 ‘유리알 유희’ 같은 것이나 아닌가 하고, 매도한다 해도, 그것은 늙은네의 고전적 편견의 탓이라고, 이해해주셨으면 한다는 얘기올시다. ‘`말씀의 우주’에서는, ‘부활’이나, ‘중생’이 주제가 되는 것이 옳으며, ‘마음의 우주’에서는, ‘해탈(니르바나)’이 주제가 되는 것이 옳듯이, ‘영겁회귀’는, ‘몸의 우주’의 주제가 되는 것이 옳다고 믿기의 까닭으로, 늙은네는 그것을, ‘아도니스 비의秘儀’의 현학적 굴절로 이해하는 것이외다. 무학의 한 촌로가, 공 같은 해박한 예언자, 그렇소이다, 공의 목소리는, 새로운 예언자적인데, 그런 이를 두고, 이렇게 천박한 소리를 지껄이는 짓은, 공의 지혜의 그릇은, 크다고, 그래서 이런 얘기쯤 담긴다고 해서, 넘친다거나, 깨어질 일은, 천만 없다고 믿어 그러는 거외다. (……)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에서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우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와 박상륭이 읽은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박상륭의 차라투스트라를 만날 수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선언했던 신의 죽음, 그리고 영겁회귀와 초인사상 등을 박상륭의 늙은네는 어떻게 이해하고 또 반박해나갈 것인가. 사뭇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다. 동서양 신화와 고전을 바탕으로 한바탕 펼쳐 보일 박상륭의 니체(차라투스트라) 읽기, 말하기!
박상륭의 새 소설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는 패러디의 본질과 속성이 매우 풍부하게 구현되고 있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박상륭의 기왕의 작품들을 통해 천착되어온 작가의 오랜 사유의 궤적이 한층 선명한 윤곽과 빛깔로 응축되어 나타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관념의 서술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판소리 가락과, 자유로운 끼어들기, 그리고 살과 피와 호흡이 느껴지는 이른바 온육파적 선정(禪定)과정의 묘사 등에는, 차라투스트라와 늙은네가 끝도 없이 이어가는 관념들의 서술이 생경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그리고 변증법적인 대화 관계보다는 자칫 폐쇄적인 독백으로 치닫기 쉬운 위험성을 상쇄시켜보려는 작가의 용의주도하고 눈물겨운 노력이 짙게 배어 있다. 바로 이러한 서술적, 문체적 배려야말로 이 소설의 육체를 보다 생생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 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새로 씌어진 차라투스트라, 이로써 우리는 하나의 끔찍스런 배밀이, 저 존재의 바깥을 한 뼘 한 뼘 깨쳐가기 위한 가장 눈물겨운 헌신의 도정을 다시 한번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변지연(문학평론가)
또한 작가가 밝히고 있는바, 이 소설은 산문집 『산해기』의 속편이기도 하다. 몸의 상태, 즉 형이하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마침내 마음의 우주, 즉 형이상의 세계를 제시한다는 박상륭 문학의 한 진경을 에둘러서 보여주었던, 그리하여 현실을 재구성한 한 편의 신화가 되었던 작품의 속편인 만큼, 박상륭 문학이 추구해온 비전을 이 작품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종교와 신화를 아우르는 우주적인 상상력, 그 장대한 스케일, 생명과 존재의 비의를 파고드는 치밀한 사유와 논리, 그리고 화려하면서도 정교하고 정확한 그의 문체는 역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의 소설, 기호와 글자들, 그리고 행간을 읽어내려 애쓰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그의 소설 속에 흠뻑 젖어들게 된다. 문학의 안과 밖을 더듬어내어 하나의 설로 완성된 앓음다운 그의 小說을 읽는, 상상을 뛰어넘는 즐거움!
이번 小說(그의 표현대로 설)에서 더욱 즐거운 것은 그의 사상뿐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노래하듯 장단을 맞추어 흐르는 그의 設을 듣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저절로 흘러나와 벌이는 한바탕 난장(亂場)에 함께하고 있다.
박상륭의 문학적 주제는 문학의 바깥에 있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문학이 안, 혹은 바깥을 갖지 않는 이상한 병 모양을 갖춘 형식이라고 할 때, 박상륭의 소설은 다시 소설의 어느 한 (곳+것)에 있다. 상극적 질서라고 말해지는 박상륭의 자연관은 통합적이고 궁극적이다. 이번 소설에서 박상륭은 물질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힘을 발견하려는 궁극이론처럼, 마음과 몸과 말의 통합(몸+멀+맘)을 진화론적으로 제시하며 신의 부재를 교정하고 있다. --함성호(시인)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그리고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로 이어지는 또 한 편의 방대한 장편소설! 저자 서문에서 간단하게 밝히고 있듯이 이 한 권의 책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는 이문구 선생의 죽음에 맞추어 서울행,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우리에게 남겨졌다. 이제 곧 그를 다시 이국땅으로 보내고 이 땅에 남겨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박상륭이 치르는 이 제의祭儀에 조용히 참례하는 것뿐일 것이다.
먼저 죽지 말기를 바랐던 이들의 둬 죽음을 가까이 보고 난 뒤, 이제는 이 패관稗官도, 뭔가를 정리해볼 때에 온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 쇼리’는 그러니, 바로 그런 목적으로 읊어진 것이며, 그런즉 이왕에 여기저기서 해왔던 얘기들의 반복도, 그런 정리해보기’의 결과라고 이해해두면, 너그러워질 수 있을 테다. 이것은 그래서 자기의 것이거나, 빌려온 남의 것이거나, ‘해묵은 포도주를 새 부대에 옮겨담기’에 비유해도 틀리지 않을 성부르다. --말머리에 꼬리 달기,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에서
소설문학의 준령 박상륭,
그가 십 년 만에 큰 숨을 토해낸다
니체와 그의 차라투스트라에 보내는 강력한 도전장!
그가 벌이는 유령과의 싸움, 이 끔찍스런 배밀이, 저 존재의 바깥을 한 뼘 한 뼘 깨쳐나가기 위한 눈물겨운 헌신의 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