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하얀색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어린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눈이 빨간색이라면 어떨까? 노란색이나 파란색이라면? 에릭 바튀의 그림책 『만약 눈이 빨간색이라면』은 이런 기발한 상상에서 시작된다.
두 페이지 가득한 감각적이고 재기발랄한 그림 속에서 주인공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시대와 공간을 종횡무진 누빈다. 뉴욕에선 슈퍼맨이 되어 사람들을 구하고, 파리에선 괴도 뤼팽처럼 로맨스를 펼치고, 베네치아에서는 마스크로 변장한 채 곤돌라를 타고 카니발의 무도회에 가며,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아라비아의 왕을 만나러 간다.
다른 색 안경을 쓰고 다른 세상 보기
에릭 바튀는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글이나 그림뿐만 아니라 색깔 자체로도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첫 장면에서, 주인공인 아이는 눈으로 뒤덮인 세상에 서 있다. 에릭 바튀는 온 세상을 다 품은 하얀 눈 위에 점점이 아이의 발자국만 찍어 놓았다. 세상은 흰 눈 앞에 사라지고, 오로지 발자국만 남은 풍경. 모든 것을 다 품는 그 하얀색 위에서 아이의 상상은 펼쳐진다. ‘만약 눈이 빨간색이라면?’ 아이의 상상을 시작으로 눈은 붉은빛에서 노란빛으로, 다시 푸른빛으로 변하면서 각각의 색이 아우르고 있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빨간 눈으로 덮인 세상에서 아이는 빨간색이 품어내는 힘과 용기를 바탕으로 슈퍼맨이 되어 세상을 지켜낸다. 연보라빛 눈이 내린 세상에서는 신비롭고 아득한 보랏빛 창공을 배경으로 날개를 달고 비행을 한다. 또한 까만 눈이 덮인 세상에서 주인공은 아득한 우주의 별빛마냥, 눈밭에 새겨진 수많은 발자국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보고 싶어 한다.
에릭 바튀는 이렇게 눈길을 잡아 끄는 강렬하고 개성적인 색채에 단순한 검은색 선만으로 이국적인 풍경을 멋지게 완성해내었다.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주인공과 강아지의 다양한 변신을 찾아보는 것도 색다른 볼거리이다.
특히 이 그림책은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면서 곳곳에 숨겨져 있는 여러 가지 패러디들을 찾아내 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빌딩 숲 한복판에 떨어지는 운석으로부터 뉴욕을 구하는 슈퍼맨의 모습에서는 9.11 테러가 연상되고(이 책의 그림에는 쌍둥이 빌딩이 없다!) 왕의 근위병이 되어 싸우는 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용감무쌍한 삼총사의 모습이, 꽃과 키스를 훔치는 낭만적인 괴도의 모습에서는 아르센 뤼팽이, 호수에 나타난 목이 긴 괴물은 네스 호의 괴수가 떠오른다.
이런 온갖 모험 끝에 주인공은 마침내 공주님을 찾아낸다. 하지만 눈을 뜨면 눈은 하얀색인 것처럼, 상상 속의 공주님도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쳐보라.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한 가지 힌트를 주자면, 이 책에서 실재하는 것들은 모두 하얀색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아이와 함께 상상 놀이를 해보면 어떨까? 만약 바다가 노란색이라면, 나무가 보라색이라면, 별빛이 초록색이라면?
옮긴이 함정임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고,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가 되었다.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당신의 물고기』 『버스, 지나가다』, 중편소설 『아주 사소한 중독』과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 『인생의 사용』, 어린이 책 『내 이름은 나폴레옹』을 펴냈다. 옮긴 책으로는 『실베스트르』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