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가족』 『달에 울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마루야마 겐지. 그는 일본 북알프스 기슭의 오지에 칩거하면서 금욕적인 생활 속에서 거의 매년 새로운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오고 있다.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매번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는 그의 예술관과 인간관이 가장 탁월하게 형상화된 작품이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과 수풀을 기어가는 뱀의 시점을 동시에 지녀야 비로소 참된 예술이 성립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처럼, 이 소설은 선과 악, 희극과 비극이 뒤섞여 있는 인간의 본질, 신이기도 하고 괴물이기도 한 반신반수(半神半獸)적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명징하게 그려내며 독자의 혼을 사로잡는 참된 예술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예술에 뜻을 둔 자라면 권력과 권위의 손이 닿지 않는 아득한 상공까지 영혼을 밀어올려 인간과 인간 세계를 부감할 정도의 배짱과 감성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인 동시에 인간을 초월한 시선으로 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감의 시선만으로는 진정한 예술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날것의 인간 본질에 육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수풀 속을 기어가는 뱀과도 같은, 더이상 낮아질 수 없을 만큼 낮은 시선도 함께 지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순투성이의 비극적이며 동시에 희극적인 인간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 마루야마 겐지, 월간 『나미』와의 인터뷰에서
마술적 상상력으로 쌓아올린 압도적 세계관
봄날, 비 걷힌 이른 오후, 두 남자가 신록의 들판을 가로질러간다. 암흑가 양대 조직의 우두머리를 한꺼번에 살해하고 쫓기는 몸이 된 야쿠자 백주 대낮의 긴지와, 시골에서 어부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옛 부하 마코토. 긴지는 그의 도움을 받아 북녘 바닷가에 있는 백 미터 높이의 전파탑에 은신해 재기의 기회를 노린다. 봄날의 훈김에 생명들이 자욱하게 자라는 바닷가 벌판의 낮과 밤, 비와 무지개의 장관이 펼쳐지는 대자연 속에서, 긴지에게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정체불명의 기괴한 나무 가면이 그에게 말을 걸어오고, 밤마다 저승사자가 나타나 그를 지옥으로 데려가려 한다. 고고하고 날카로운 악으로 가득했던 그의 영혼이 조금씩 흔들리고, 마코토는 반대로 이 일을 기회로 삼아 다시 암흑가로 화려하게 복귀할 헛된 꿈을 꾼다. 그의 선량한 벙어리 아내와 다섯 살짜리 어린 딸 하나코까지 긴지의 은신생활을 돕는다.
그러던 어느 날, 긴지는 마코토의 소개로 은퇴한 문신사 조각룡을 만나 등에 무지개 문신을 새기게 되고, 무지개의 색이 하나씩 들어갈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긴지의 운명을 뒤흔든다.
빨강과 파랑, 자신들의 무덤을 만들며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던 노부부의 어긋난 죽음.
노랑, 마코토가 관련된 밀입국자들의 무리에서 낙오된 한 여인의 죽음.
초록, 패잔병 부대의 망령과 노부부가 기르던 검은지빠귀의 죽음.
주황, 마코토의 계획에 의한 마약 탈취 과정에서 벌어진, 마약회수선 선원들의 몰살.
남색, 정년을 앞둔 경찰의 피살과 마코토 아내의 유산.
그리고, 보라색 대신 칠흑 같은 먹빛이 새겨지며 마침내 일곱 색깔의 무지개가 완성되고, 소설은 예기치 못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주인공 긴지는 마루야마 겐지의 다른 어떤 작품의 주인공보다 고고하고 초연하며 강인하다. 그는 곧 작가 자신의 투영이기도, 또 그가 선망하는 『백경』의 에이햅 선장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긴지는 악에 물든 자가 아니다. 긴지가 악을 물들이고 있다는 소설 속 문장이 보여주듯, 그는 세상의 어떤 악보다도 더 강력하고 순정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영혼이 흔들린다. 긴지를 둘러싼 대자연의 모든 물상들이 그를 치켜세우고, 비난하고, 경탄하고, 조롱한다. 바람과 파도, 꽃과 새, 전파탑, 가면, 저승사자가 제각각의 목소리로 긴지를 에워싸고 있는 마술적이고 환상적인 세계, 그 속에서 요동치는 긴지의 영혼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소설의 문장은 간결하고도 힘이 넘친다. 문장 하나하나가 소설에 속도와 긴장감을 부여하며 독자를 압도적인 힘으로 빨아들인다. 형이상학적인 문장들이 하드보일드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진기한 풍경은 분명 마루야마 겐지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진경이다.
지상 백 미터 높이에서 울려퍼지는 <마태수난곡> 제78곡
또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요소는 소설 후반에 울려퍼지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백경』과 함께 예술의 가장 위대한 전범의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이 이 작품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에 결정적인 모티프를 제공했고, 그는 이 곡을 틀어놓고 작품을 써내려가며 <마태수난곡>과 『무지개여, 모독의 무지개여』를 하나의 작품으로 녹여냈다. 작품 속에서 <마태수난곡>의 마지막 제78곡이 울려퍼질 때, 긴지와 그의 부하 마코토의 관계, 그리고 긴지의 최후가 예수의 수난과 겹쳐지면서 새로운, 역설적인 의미의 울림을 낳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이 작품 전체가, 긴지를 둘러싼 대자연이 부르는 다성성(多聲性)의 대합창곡이 되어 울려퍼진다. 높이 백 미터의 텅 빈 탑 내부에 <마태수난곡> 제78번곡의 장엄한 선율이 가득 울려퍼지고 마침내 주인공이 무지개와 함께 최후를 맞는 소설의 대단원은 이 작품의 전체를 압축하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다.
이십 세기 일본문학이 달성한 눈부신 경지
문신이라는 뒷골목 세계의 색채를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바꾸어낸 놀랄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혼의 정화를 꿈꾸는 야쿠자를 둘러싼 여러 요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교양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소설의 전통에서는 주인공의 정화가 문제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가면, 검은지빠귀, 저승사자, 문신이 곧 주인공이며, 그 주인공들의 패배가 이 소설의 결말을 한없이 아름다운 색으로 수놓고 있다. ―주간 문춘
마지막까지 줄곧 숨쉴 틈 없이 압도적인 힘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진 작품이다. 끊임없이 분출하는 정념, 선과 악에 대한 집요한 심문,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팽팽한 대결이 최종적으로 응축된 일곱 색깔의 무지개야말로 곧 긴지라는 사상 유례없는 주인공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형상이다. 그 무지개의 완성이 그를 또다른 운명으로 이끌며 생각지도 않은 대단원이 찾아온다. 이 마지막 장면은 이십 세기 일본문학이 달성한 눈부신 경지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메이지 시대의 대문호라면 나쓰메 소세키나 모리 오가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대문호라 부를 수 있을 사람은? 아마 마루야마 겐지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존 독자서평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
1966년 「여름의 흐름」으로 『문학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스물세 살의 나이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37년 동안 최연소 수상자라는 영예를 누렸다. 일본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특출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일본 중부의 고산지대인 나가노 현 아즈미노에 거주하며 창작과 정원 가꾸기에 몰두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소설 『물의 가족』 『천일의 유리』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천 년 동안에』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도망치는 자의 노래』, 소설집 『어두운 여울의 빛남』 『아프리카의 달빛』 『달에 울다』, 산문집 『아직 만나지 못한 작가에게』 『소설가의 각오』 등이 있다.
옮긴이 양윤옥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 『슬픈 李箱』 『그리운 여성 모습』 『글로 만나는 아이 세상』 등의 책을 썼으며, 『철도원』 『일식』 『달』 『가면의 고백』 『플라나리아』 『연애 중독』 『장미 도둑』 『파리로 가다』 『첫날밤』 『라쇼몽―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집』 『사랑을 주세요』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2004년 7월 9일 발행
* ISBN 89-8281-838-3 04830 (1권) * 신국판 | 1권 376쪽, 2권 384쪽 | 각권 9,000원
* 담당편집 : 이상술(031-955-8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