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자책으로 발표되었던 백민석 소설 『러셔』가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을 쓰기 전 작가는 인도여행을 다녀온 직후였고, 그래서 처음엔 그 감상을 여행소설로 써보려고 했었다 한다. 그러나 그 여행소설은 한 편의 SF소설이 되어 나왔다. "(왜 하필 SF였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하지만 가상 사막 샘 샌드 듄이나 마켓들의 상반된 풍경들, 계급 구조, 몇몇 인물들의 묘사는 분명 그 여행에서 구해졌다."
그렇다. 『러셔』는 SF소설이다. 그러나 그에게 왜 SF인가라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그 동안 백민석이라는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준 작품세계는 환상적 리얼리티(『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극단적인 사도―마조히즘(『목화밭 엽기전』) 등 그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했다. 때문인지 SF라는 문학적 시도 역시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망각을 부르고 의미를 무화시키고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는 속도의 세계
그 무위의 세계를 초월하는 첨단의 상상력
소설은 ‘컴퓨터로 통제되는 견고한 지배 메커니즘과 거기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소재로 삼고 있다. 지구를 대기오염의 환경재앙에 휩싸이게 만든 에코 데미지가 발생한 지 28년, AD 28년의 가상사회. 소설의 배경인 싸우스 코리아 시(市)’는 심각하게 환경이 오염된 현실세계와, 그 현실세계의 오염물들을 배출해내는 ‘샘 샌드 듄’이라는 가상 차원의 사막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실세계의 오염물들은 ‘호흡중추’의 통제로 ‘호흡구체’라는 거대한 팬을 통해 ‘샘 샌드 듄’으로 배출된다. 샘 샌드 듄은 일종의 거대한 쓰레기장인 동시에 유배지인 셈이다.
호흡중추는 에코 데미지가 극에 달했을 때 세워졌다. 환경 재앙은 어느 특정한 시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시 정부 연합에서 그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일종의 대기정화프로젝트로, 각각의 시는 호흡구체라는 거대한 정화 시설물들을 건설하기로 했다. 호흡구체를 통해 더는 숨을 쉬기가 위험해진 도시들의 대기를 정화하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호흡구체가 정화하고 남은 환경물질을 처분할 공간의 문제는, 당시에 갓 개발된 차원 생성기를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즉, 가상의 차원을 만들어 그곳에 환경물질을 비롯한 갖은 오염물질들을 내다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가 메꽃과 함께 다녀온 샘 샌드 듄이라는 이름의 가상 차원 사막은 그러니까, 시의 쓰레기장인 셈이다. --본문에서
이 작품에서 백민석은 미래사회를 초월자 계금, 능력자 계금, 기술자 계급, 그리고 노동자 계급으로 분화시켜놓고 있다. 주인공인 용병(능력자 계급의) ‘모비’와 여전사 ‘메꽃’은 미래사회의 지배권력인 초월자 계급에 의해 가동되는 호흡중추(얼핏 보기엔 이 호흡구체를 통해 도시의 공기를 정화하는 듯 보이지만 이 호흡중추는 오히려 오염된 도시의 실체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모비와 메꽃의 눈엔 오히려 샘 샌드 듄의 하늘이 더 맑아 보인다.)를 파괴하기 위해 도시 심장부로 러시를 감행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는 것이 소설의 중심 줄거리이다. 얼핏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이 외형적인 스토리 라인의 뒷면에는 기존의 SF와는 다른 백민석 식의 소설문법이 숨어 있다. 우선 선악의 대립구조가 분명하지 않고 모비나 메꽃이 왜 호흡중추를 파괴하려는가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 저항의 당위성은 생략된 채 무모한 돌진만이 텍스트에 가득하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이용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드러난 권력(조지 오웰이 『1984』를 통해 그려냈던 ‘빅 브라더’ 같은)보다 ‘러셔’에서 ‘초월의 나무’로 형상화된 실체 없는 권력과 그 권력에 스스로 편입하는 두 주인공의 여정은 미래의 절대적인 권력 메커니즘에 대한 불안을 더욱 극적으로 상징한다.
또한 이번 소설에서 해설을 쓴 이수형 역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백민석에게 폭력이란 19세기의 대도시 파리에 퐁텐블로 공원을 만들어 도심에 자연을 가두어놓은 것처럼, 그리고 세련된 24시간 편의점의 조명 아래 핏덩이들이 낭자한 것처럼, 현대의 문명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게다가 폭력은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우리들이 매혹되기조차 하는 것이다. 과연 현대의 폭력은 테러리즘뿐 아니라 시가전, 도시 게릴라의 형태로 점점 더 사회 속으로 파고들고, 가학-피학적이거나 히스테릭한 방식으로 "좋은 냄새가 나쁜 냄새를 죄다 몰아낸" "범죄율이 가장 낮은 도시"에 사는 개인의 심리 안으로 스며든다. 『러셔』가 전작과 다른 점은, 전작이 사회 현상이나 개인의 심리를 배경으로 문명 속의 폭력의 발생학을 탐구하던 것과 달리 『러셔』에서의 폭력은 속도를 매개로 현대 문명과 접속된다는 것이다.
또하나, 『러셔』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작품에 우리에게 익숙한 영상 이미지들이 텍스트 전체에 스며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주인공 모비가 추방되는 ‘샘 샌드 듄의 모습이나 호버 탱크라는 이름의 공격용 우주선과 전투장면, 그리고 주인공 모비와 메꽃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장면 장면과 인물들은 곧바로 어떤 영상으로 이어진다.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는 또렷한 이미지들이 떠오르고, 이것은 곧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으로까지 이어진다.
호흡중추를 파괴하려는 모비와 메꽃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모비는 모든 것들을 허무로 돌려버리는 속도의 세계이며 허무의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한 그루 나무가 된다.
나무는 땅을 지탱해 서 있지도 않았고, 덩치를 지탱하기 위해 땅에 내릴 뿌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수천 개의 가지들을 한데 묶는, 기둥줄기도 없었다. 가지들은, 광휘의 잎을 잔뜩 매달고는 나무 자체가 그런 것처럼 그저 공중에 떠 있었다. 뿌리도 기둥줄기도 없이, 그저 가지들끼리. 그리고 그것들은 겨우 감지할 수 있을 만큼의 느린 속도로, 여전히 회전하고 있었다. (......) 그의 머리카락들로부터 몇 가닥, 두터운 전광이 뻗어나왔다. 질의 이마 위에서 보았던 바로 그 전광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초월의 나무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추신경 없는 말단신경, 즉 독립 신경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자신이 세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어떤 것에 대한 완벽한 확신은, 그것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는 광휘가 됐다. 광휘 한줄기가 됐다. 메꽃, 러시! --본문에서
그리고, 문학평론가 이수형이 말하듯 "이제 초월의 나무이며 광휘가 된 모비는 실제 차원에서는 소문으로만 떠돌 뿐 아무도 보지 못한 초월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실제 차원에서 모비가 만난 질은 수수께끼 같은 말로 모비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상대를 압도하려 들기보다는 반대로, 설득하고 타협하고 공감하고 더불어 그를 자기에게 감응시키려고 애쓰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모비에게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에 대해서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그와의 공감과 감응이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감"을 준다. 초월자로 진화한 모비 역시 타자를 그렇게 이끌 것이다. 광속으로 러시하지만 폭력이 아니라 화해를 추구하는, 새로운 존재가 또 하나 탄생하는 순간이다."
독자를 항상 카오스와 블랙홀로 이끌어갔던 그 특유의 상상력은 이 『러셔』에서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한다. 백민석은 『러셔』에서 수동타자기 식의 감성과 사유를 첨단의 상상력과 융합시킨다. 사라져간 것들과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 그리고 느리고 깊은 사유…… 이로써 『러셔』와 우리 시대의 경박한 사이버펑크 스토리들 사이에는 좁혀지기 힘든 심미적 거리가 생겨나게 되었다. 강상희(문학평론가, 경기대 교수)
『러셔』에서는 실재성의 확보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다. 어느 차원에 있든 주체의 물질성 자체가 이미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때문에 가상 차원은 "차츰 일상화되어서, 일상에 스며들어서, 생활의 한 차원이" 된다. 오히려 『러셔』는 실재성, 정체성이라는 존재론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생활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의 문제, 말하자면 통치와 지배, 그리고 그에 대한 복종이나 협력 혹은 저항 등의 사회적 활동을 총칭하는 의미에서의 정치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이수형(문학평론가)
망각을 부르고 의미를 무화시키고
모든 것을 허무로 돌리는 속도의 세계
그 무위의 세계를 초월하는 첨단의 상상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