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 물꼬를 튼 한국-베트남 문학 교류, 문학적 결실을 맺다
1980년대와 그 이후의 역사적 문학적 변화 속에서도 한결같은 여정을 걸어온 시인 김정환의 새 시집 『하노이-서울 시편』이 출간되었다. 이 연작시집 『하노이-서울 시편』의 첫째 의의는 우선 잊혀지지 않는 상흔을 간직한 베트남과 한국 문인들의 역사적 교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집의 창작 동기는 2000년 초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베트남 방문. 80년대 이후에 한국문학에서 추방되다시피 한 문학적 정의(正義)를 찾으려는 작가들의 상징적 행보인 이 방문에 동참했던 김정환은 이때의 기억들을 하노이-서울 시편으로 남겼다.
베트남 작가연맹 서기장인 시인 휴틴과 소설가 이문구가 회담을 나누고, 공동 성명을 발표한 공식적 자리뿐 아니라, 모국의 지난한 저개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베트남의 뒷골목, 아름다움이 역사이자 운명인 하롱 베이의 자연, 대학생들의 오토바이가 질주하는 하노이 새로운 풍경 속을 바쁘게 누비고 다녔던 시인 김정환은 이를 23편의 시로 기록하여, 한국 문인들을 오랜 지인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던 베트남의 문인들, 특히 시인 휴틴과 듀앗, 소설가 바오닌 등에게 바치고 있다.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베트남의 풍경들
『하노이-서울 시편』은 우리 시대의 소외된 시적 정의(poetic justice)를 환기하는 김정환의 한결같은 여정 위에 놓여 있다. 『황색 예수전』『지울 수 없는 노래』『순금의 기억』등에서 현실 변혁에 대한 자기 확신과 열정을 한결같이 노래해온 김정환은 우리의 가까운 과거사를 베트남이라는 구체적이고도 상징적인 공간에서 현재화하면서, 80년대 이후 문학의 바깥으로 추방된 시적 정의(poetic justice)의 복원을 도모한다. 베트남의 소박한 농촌에는 한국의 "가난했던 시절의/아름다운 전망"(「첫 논과 밭--하노이-서울 시편2」)이 빛나고, "과거의 권위와 미래의 전망이/겸손하게 만나는"(「하롱 Bay로--하노이-서울 시편3」) 풍경들 속에는 "해체와 건설이 동시 진행되는" "모종과 이중"(「첫논과 밭--하노이-서울 시편2」)의 세월이 펼쳐진다. 그는 베트남으로 가서, 잊혀진 한국의 역사와 한국 문학의 시적 정의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짓밟은 나라에서의 회고가 마냥 순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베트남의 변함없이 살아 숨쉬는 "혁명의 열기를 증거" 하면서도, 한편으로 "혁명의 열기가 주책으로 되어버린/남한의 시대도 증거"(「3중주--하노이-서울 시편6」)한다. 그리하여 베트남에 대한 이중의 미안함과 씁쓸함,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투명하게 걸러내어 보여주는 베트남의 풍경들과 곳곳에서 마주치는 시인의 시선 속에서, 한국인의 미묘한 입장을 곁들인 베트남 사회에 대한 관찰적 입장과 한국의 역사와 문학의 뿌연 전망을 정화시키려는 의지가 만나게 된다.
이해와 만남을 기약하는 실천적 장
김정환의 『하노이-서울 시편』은 베트남 방문의 기록으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또하나의 실천적 장으로서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베트남의 대표 시인 휴틴의 시집이 국내에 최초로 번역 출간됨과 동시에 김정환의 이 새로운 시집 역시 영역되어 베트남 문인들과 만난다.
정겨운 마을이 편안한 산맥이 되고 사람 냄새
물씬한 강이 위험한 지도가 되는
이륙하는 상공에서
정겨운 것은 얼마나 아픈 것인지 물씬한 것은 얼마나
슬픈 것인지.
--「상공에서--하노이-서울 시편20」중에서
이렇게 정겹고 슬프게 작별을 고했지만,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또다시 이어질 것이다.
* 2003년 8월 30일 발행
* 4*6판 양장/88쪽/6,500원
* ISBN 89-8281-711-5 02810
* 책임편집 : 박여영(927-6790 내선 201)
그래, 역사가 단지 뒤늦게 비교될 뿐 아니라
우리는 어제의 오늘을 보게 된다
내일의 오늘이 아니다
왔던 길도 가야 할 길도 아닌 그 중첩 속에서
비로소 길이 나고 나는 그 속으로 기분좋게 길을 잃는다
--「편안하게 길을 잃다-아침--하노이-서울 시편17」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