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고 투명한 존재의 벽 저쪽에서 까마귀가 운다!
{까마귀가 쓴 글}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것은 시장사회 속 문학의 존재방식과 운명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글쓰기에 대한 깊은 자의식이며, 이러한 글쓰기 의식을 표상하고 있는 이미지가 바로 까마귀이다.
까마귀가 쓴 글을 표방하고 있는 이번 소설집에서 김현영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초현실적인 분위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전통적인 소설의 영역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현대적인 삶의 장면들과 직접 마주하고 있다. (이상의 [오감도(烏瞰圖)]가 까마귀의 음울한 시선으로 현대의 풍경을 조감한 까마귀가 본 그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현영의 까마귀 또한 체계의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된 이미지들로 구성된 현대적 의식의 한 측면을 표상하는 일종의 메타포이다. 말하자면 김현영의 까마귀의 시선은 일상적 시선의 표면을 걷어내고 그 아래 잠복해 있는 비일상적인 세계를 드러내는 한편, 그를 통해 일상의 메커니즘을 비판하는 기획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냉장고}가 출간된 이후 발표한 여덟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소설집 {까마귀가 쓴 글}은 다채로운 폭을 가지고 있다. 시장사회 속 문학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의식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신개념 워드 프로세서」), 인간세계에 대한 우화적인 풍자를 담고 있기도 하고(「까마귀가 쓴 글」), 후기자본주의사회 속에서 겪는 독신 여성의 의식세계를 펼쳐 보이는가 하면(「누구를 위하여 초인종은 울리나」 「웨딩웨딩드레스」), 반복되는 운명 속에 놓인 삶의 이면을 투시하고 있으며(「사당역」 「안달루시아의 올리브」), 불행한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의 일대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기도 하다(「그의 리볼버」 「꽃 핀 아몬드 나뭇가지」).
이렇게 다양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여덟 편의 작품들은 "현대적 일상 속에 내재된 균열로부터 흘러나온 욕망의 일그러진 표정들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한 가지 주제로 엮여" 있으며, 이를 작가 자신만의 "독특하고도 돌출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포착하여 경쾌하면서도 견고한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소설 언어는 비애와 명랑, 차분함과 경쾌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다. 그가 현실에서 발견하여 소설 속으로 옮겨놓은 현대성의 균열들이 만만치 않은 흡인력을 내장하고 있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손정수, 계명대 교수)
운명이 써놓은 현실, 그 밖으로 나가기!
비단 「신개념 워드 프로세서」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김현영의 주인공들은, 곧 우리 현대인들은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누군가가 프로그래밍해놓은 현실을, 무엇에 의해서인가 운명지워진 현실을 살고 있을 뿐이다. 가족으로부터 보호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채 정신적 상처와 결핍을 경험하는 주인공들은 간절하게 소통을 욕망하지만 결국 자기의 목소리밖에 듣지 못하고(「꽃 핀 아몬드 나뭇가지」), 그것은 결국 퇴행적인 환상으로 옮아간다. 스스로 냉장고 속으로 기어들어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자기 안으로 들어가 있었던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일 것인가?
가족들을 모두 냉장고 안으로 몰아넣었던 그녀의 상상력은 아몬드 나뭇가지에 꽃을 피우고 까마귀를 도시로 불러들인다. 그녀가 펼쳐 보이는 꿈같은 현실을 뒤쫓다보면 얼음같이 차가운 한기와 외로움에 고통받는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생의 엇갈림 속에서 혼백으로 서성대거나 걸으면서도 악몽을 꾼다. 그녀는 악몽을 꾸어서라도 그림을 그려야 하는 화가처럼, 그녀만이 꿀 수 있는 꿈을, 그것이 악몽이라도 냉정하게 그릴 줄 아는, 고통받는 화가이다. 천운영(소설가)
스스로 냉장고 속으로 기어들어가 태아처럼 몸을 구부린 채 잠이 든 아이를 기억하는가. 김현영은 소설집 {냉장고}를 통해 냉장고를 어머니의 자궁보다 더욱 따뜻하게 느끼는 세대의 욕망을 대변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계-인간들이 기계의 차가운 이물감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도 안다, 기계가 행복을 보장해줄 수 없음을. 그들은 다만 돌아가 안길 어머니의 자궁을 가지지 못했을 뿐이다. {까마귀가 쓴 글}은 이 상황에 부닥친 그들의 이유 있는 항변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점차 거처를 잠식당하는 도시 야산의 까마귀 울음소리를 닮아 있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연인과 의사소통이 단절된 시민 K의 독백 같기도 하다. 신수정(문학평론가)
* 초판발행 | 2003년 9월 2일
* 신국판 | 304쪽
* ISBN | 89-8281-719-0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이상술(927-6790, 내선번호 213, 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