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 얀 아페리의 장편소설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가 출간되었다. 얀 아페리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로, 희곡, 뮤지컬 대본 등을 주로 쓰다가 1997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소설로 아셰트 재단 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에 프랑스 예술국에서 주최하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에 발탁되어 이탈리아 빌라 메디치에 2년간 체재하는 등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는 지난 2000년에 발표되어 메디치 상을 받았다. 수상 당시 ‘현대의 새로운 낭만주의 작가가 탄생했다’는 찬사를 받은 얀 아페리는 현대 프랑스 문학에서 보기 드문 풍부한 에피소드와 화려한 문체로 제목만큼이나 독특하고 개성적인 작품을 빚어냈다.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는 ‘음악 속의 악마’라는 뜻으로, 음악용어인 ‘트리토누스’의 속칭이다. 중세에는 이 음정을 내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되므로 작곡할 때 반드시 이를 피했다고 한다. ‘트리토누스’ 모티프는 소설 속에서 좀더 확장되어, 마치 주인공이 작곡한 음악 속에 실제로 악마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을 파멸로 몰고 간다.
시간의 불가역성에 도전하는 천재 음악가의 예술혼이 피워올린 죽음의 불꽃!
소설의 주인공은 ‘모에 인상긴’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음악도. 프랑스어 형용사 ‘상긴(sanguine, 피의, 붉은빛의)’을 연상시키는 그의 성(姓)은 앞으로 펼쳐질 아름답지만 잔혹한 그의 인생을 예고한다.
나는 붉은 차양이 드리워진 커다란 살롱에서 손가락으로 상아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건반에서 감히 손을 떼지도 못한 채 도대체 얼마 동안 라자루스 제주룸을 응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 내 손은 여전히 피아노 건반 위에 머물러 있었고, 메트로놈의 추도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콧구멍 가장자리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가느다란 두 줄기 선혈은 입술 끝으로 번지다가 목젖을 타고 굵어졌고, 이내 와이셔츠 속으로 흘러내렸다. 메트로놈은 쉬지 않고 똑딱거렸다. 시간은, 템포 루바토의 공허한 움직임 속에 헛돌고 있는 메트로놈 추의 지배 아래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소설의 첫 장면은 주인공 모에가 친구 라자루스 제주룸과 함께 살롱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오직 메트로놈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한 사람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한 사람은 피를 흘리고 있다. 독자의 호기심이 증폭되는 가운데, 무대는 돌연 시카고의 어느 겨울날로 바뀐다.모에는 시카고에서 세력을 잡고 있는 마피아 집안의 적자로 태어나지만, 태어나면서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었다. 그는 말한다. “난 알고 있다. 하나의 생명을 위해 적어도 두 사람의 죽음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그의 아버지 오텔로는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오지만, 지난 시절의 사랑을 잊지 못해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해간다.
절망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던 모에는 오르간 연주자 파올로 두란테를 만나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던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선보이게 된다. 그렇게 모에는 음악이라는 신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곳에서 재즈를 발견한다. 재즈의 심오한 매력에 흠뻑 빠진 모에는 죽은 애인이 남긴 작품을 해독하려 애쓰는 파올로 두란테에게 그 해결의 열쇠로 재즈를 소개해준다. 이 무렵 모에는 트리에스테의 한 병원에서 도망친 안나라는 여자아이를 만난다. 안나는 거꾸로 걷고, 말도 거꾸로 하고, 야생마처럼 들판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수수께끼 같은 소녀이다. 모에는 안나를 숨겨주지만 안나는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밝히지 않는다. 안나는 소년 예술가 모에의 ‘뮤즈’가 되고, 결국 사람들이 와서 안나를 데려가지만 그녀와의 짧고도 강렬한 사랑은 화인(火印)처럼 모에의 가슴에 남는다.
성장하여 고향을 떠나 로마의 음악학교에 진학한 모에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모에와는 대척점에 서 있지만 그가 필생의 작품을 쓰게끔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라자루스 제주룸, 라자루스의 친구이자 모에의 또다른 뮤즈가 되는 아드리아나, 그리고 촉망받는 성악가였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저주받은 예술가’안니발 메를리니 선생 등이 그들이다. 클래식만이 유일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메를리니 선생은 재즈에 대한 모에의 열정을 짓밟고, 결국 모에는 아카데미즘에 환멸을 느껴 학교를 나와버린다. 고향으로 돌아와 음악 공부를 계속하지만, 아버지가 죽자 라자루스와 함께 로마로 가 그의 후원하에 작곡에 열중한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라자루스와도 사이가 틀어져버리고, 모에는 트리에스테로 떠나 필생의 작품을 창조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아붓는다.
마침내 그가 작곡한 <영생의 발라드>가 청중 앞에서 연주되는 순간, 우리는 상상도 못한 장면과 맞닥뜨린다… 소설 말미에 이르러서야 독자는 소설의 첫 장면이 무슨 장면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좀체 깨어날 수 없는 독주를 마신 것 같은 얼얼함이 읽는 사람의 머릿속을 강타할 것이다.
관능적이고 거침없으며 바로크적인, 하나의 웅장한 교향곡 같은 소설!
이 소설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악보처럼 구성되어 있다. 여러 악기 파트가 현란하게 그려진 악보처럼, 이 소설에서는 여러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중첩되어 화음처럼 울린다. 모에의 스승 파올로 두란테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멋있는 건 이 악기들이 나란히 그려져 동시에 소리를 낸다는 사실”이며 “그 복잡함이야말로 이 언어의 위대함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음악도이면서 동시에 소설가인 얀 아페리의 역량과 야심을 발견할 수 있다. 아페리는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라는, 하나의 웅장한 교향곡과도 같은 소설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교향곡이 뿜어내는 음악적 스펙트럼은 폭이 매우 넓다. 고음악에서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언급된다. 페어팩스와 메이너드 퍼거슨, 다리우스 미요와 마일스 데이비스가 동시에 등장하며, 오르간과 재즈의 즉흥연주가 함께 연주된다. 음악에 대한 해박함은 물론이거니와 사이사이에서 빛나는 작가의 유머와 위트가 절묘하다. 예술을 향한 열정, 그리고 그 예술의 순수한 본령을 지켜내려는 결벽에 가까운 주인공의 분투는 순결한 예술지상주의가 발하는 가슴 벅찬 감동을 맛보게 해준다. 치열한 고민 없이 쓴 소설, 부박한 개인적 감상만이 넘치는 요즘의 소설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진정한 기품을 갖춘 예술적 귀족주의가 사라진 지금, 이 젊은 작가의 행보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이 소설은 창작의 산고에 시달린 음악가가 광기에 휩싸여 모든 청중을 살해하는 파괴적인 작품을 쓰고 만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광기는 오직 생명 자체를 내걸 때만 접근할 수 있는 절대적 아름다움이 갖는 치명적 특성으로, 고통받는 창작자의 무의식적인 잔인함과 절대미가 갖는 철저한 비인간성, 그리고 신의 자리에 도전하는 예술가의 원대한 야심을 의미한다.
청명한 이탈리아의 햇살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어둡고 격렬하고 찬란한 천재의 운명, 그 독특한 이야기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로 얀 아페리는 빛나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 Le Monde
우리가 메디치 상 심사위원들을 나무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얀 아페리와 같은 재능 있는 젊은 작가를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Le Figaro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이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으며, 미장센 감각과 작품에 어울리는 스타일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 Figaro Madame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의 문학적 성과는 그 화려함과 유쾌한 복잡성에 있다. 관능적이고, 거침없으며, 바로크적인 작품이다. -Telerama
얀 아페리
1972년에 태어났다. 보마르셰 상을 수상한 희곡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 등 연극이나 악극을 위한 대본들을 여러 편 발표하던 중, 남다른 열정을 갖고 집필한 첫 소설 『누구야』로 1997년 아셰트 재단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에 프랑스 예술국에서 주최하는 촉망받는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에 발탁되어 이탈리아 빌라 메디치에 2년간 머무르며 연구하는 동안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를 구상했다. 이후 『밤하늘의 모순』(1999), 『디아볼루스 인 무지카』(2000), 『파라고』(2003)를 발표하면서 프랑스 문단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 열정과 재능이 넘치는 이 젊은 작가는 파리와 로마를 오가면서 연극과 소설,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옮긴이 신미경
연세대학교 불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후, 프랑스 파리 3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프랑스 문학사회학』이 있으며, 『신화』(창해 ABC 총서), 『마법의 숙제』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2003년 9월 20일 발행
*신국판/336쪽/8,800원
*ISBN 89-8281-687-9 03860
*책임편집 : 김지연(031-955-8860)
"현대의 새로운 낭만주의 작가"의 탄생을 알린 2000년 메디치 상 수상작!
시간의 불가역성에 도전하는
천재 음악가의 예술혼이 피워올린 죽음의 불꽃!
이제 음악 속의 악마가 깨어나 우리는 집어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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