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작가 아베카시스의 악마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역사 스릴러
1995년 겨울, 베를린 자택에서 독일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신학자 실러가 허리가 잘린 채 발견된다. 그러나 시신의 상반신은 사라지고 없다. 실종된 상반신 때문에 사건이 미궁에 빠지자, 기자인 펠릭스 베르너는 친구이자 제2차 세계대전 사(史)를 전공한 젊은 역사학자 라파엘 심머에게 사건 조사를 의뢰한다. 수사에 뛰어든 두 사람은 파리에서 워싱턴, 로마에서 베를린을 넘나들며, 유대신학자, 가톨릭 성직자, 역사학자, 아우슈비츠 생존자, 레지스탕스, 대독협력자들의 증언을 추적해나간다. 실러 살인사건의 첫번째 용의자로 지목된 것은 벨라 페를망. 그는 유대인 수용소 생존자인 부모의 수치스런 과거를 견디다 못해 정신병에 시달리는 인물로, 실러를 죽인 총이 그의 집에서 발견됨으로써 즉각 혐의를 의심받는다. 그러나 곧 역사학자이자 비시 정부 역사 전문가인 장 이브 르레가 실러의 숨겨진 행적에 분노해 여러 통의 협박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드러나 용의자로 기소됨으로써 사건은 복잡하게 엉켜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라파엘과 펠릭스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수사 결과와 상반되는 진실이 수면에 떠오른다. 세계적인 명성의 독일 정치가이자 신학자로 알려졌던 희생자 실러가 사실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그것. 게다가 자신의 과거를 함구하던, 벨라의 아버지 사미 페를망이 자살하면서 그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동족을 배신했음이 드러나고, 단순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사건의 반경은 급속하게 넓어진다. 여기에 과거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곤욕을 치르는 탈망 부부, 수백만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시킨 비시정부 관리 모리스 크레텔, 라파엘과 펠릭스의 주위를 맴돌며 악의 접신론과 사탄의 경전에 경도된 프란시스 신부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이 복잡한 스릴러와 맞물려 돌아가는 주인공 라파엘과 페를망 부부의 딸인 조각가 리자 페를망의 러브 스토리는 또다른 재미. 그러나 의심할 새도 없이 미로 같은 이야기 속을 헤매던 독자들은 의외의 결말과 마주치게 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허를 찔려 다시 한번 작품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책은 두 번 읽어야 하는 책이다.
‘쇼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통 나치 체제하에서 저질러진 유대인 학살을 지칭할 땐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홀로코스트는 ‘희생물, 제물’이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나치가 저지른 참상의 ‘희생양’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황금과 재』에서 작가는 홀로코스트 대신, ‘참사, 파괴’라는 뜻의 ‘쇼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작가가 그 단어를 사용한 데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일까? 아베카시스는 유대인은 가련한 희생양이며 독일인은 가해자로 보는 ‘이미 결정된’ 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아직도 쇼아의 역사 기술(記述)은 끝나지 않았다는, 아직 진행형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거와 현재가 일치하지 않는 이중적 삶을 살아온 자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작가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유대인 수용소 생존자 사미 페를망은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족을 배신한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의 가족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비밀로 안고 살아간다. 그의 부인인 미나 페를망은 인권선언자문위원회 고문으로 유대인 학살을 고발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까지 펼치며 과거를 은폐하려 한다. 독일 협력자를 증오하고 유대인인 리자 페를망을 사랑함으로써 친유대적 성향을 보였던 역사학자 장 이브 르레 역시 아버지가 나치 독일 국방군 장교이자 전범인 헬무트 뷔르츠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 외의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숨겨진 과거를 지닌, ‘독일인은 가해자, 유대인은 피해자’라는 단순 이분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이들이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과거의 역사 아래 우리가 지나쳤던 선과 악의 이면과, 그에 대한 작가의 다층적인 시선이 엿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풍부한 신학적 사유를 펼쳐 보이며 신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 어떻게 선한 신이 홀로코스트라는 잔혹한 과거를 방치해버릴 수 있는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 신의 관점에서는 악조차도 미래의 선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쇼아’라는 잔혹상 앞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 그런 면에서 소설 속에 하나의 우화로 삽입되어 있는 SS대원이 된 예수의 이야기, 즉 악의 화신이 됨으로써 세상의 악을 십자가로 짊어지려는 예수의 모습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악(惡)에는 악으로 대응한다는 극단적 방법으로 희생양이 됨으로써 신에 반기를 드는 예수의 모습에서 ‘어떻게 아우슈비츠와 같은 죄악을 허용할 수 있느냐’고 항변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화를 모티프로 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소설
이 소설이 더욱 흥미로운 것은 몇 해 전 프랑스를 들끓게 만든 ‘뤼시&레몽 오브락 사건’과 프랑스의 마지막 전범 모리스 파퐁의 실화를 모티프로 했다는 점이다. 레지스탕스를 배신했으며 개인적 영광을 위해 역사를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는 탈망 부부의 모습은 레지스탕스 대원인 아내가 남편을 구해내기 위해 게슈타포에게 몸을 팔고 동료를 배신한 오브락 사건과 흡사하다. 이 사건은 몇 해 전 프랑스에서 영화 <뤼시 오브락>과 『1943년 리옹의 오브락』이라는 책으로 선보이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소설에서 비시정부 관리로 나오는 모리스 크레텔 역시, 비시정권 하에서 보르도 지역 치안 책임자를 지내며 천육백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프랑스의 마지막 전범 모리스 파퐁의 생애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작가는 이들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도 유보한 채 프랑스를 논쟁으로 이끌었던 그 현장을 소설 속에 고스란히 옮겨놓으며, 그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천재작가 아베카시스는 질풍 같은 필체로, 악에 관한, 그 화려한 업적에 관한 이 무시무시한 소설을 창조했다. 그 무엇도 도망칠 수 없다. _리르
스릴러인 동시에 우리 시대의 혼란에 관한 예리하고도 명석한 성찰의 작업. _아마존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는 스필버그를 연상시킨다. _레벤망 뒤 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