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깊은 곳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시편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병률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가 출간되었다. 조금은 어두운 조명 아래서 꼼꼼하게 직조된 그의 시는 편편이, 오늘날 거칠고 소란스러운 언어들 사이에서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이 잊고 지나쳐버린 의미를 정성스럽게 건져올리고 있는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밥냄새, 찌개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아, 마음속 허기는 더해간다.
어두운 방을 밝히는 외로움의 기록늦은 밤 불 꺼진 방에 홀로 문을 따고 들어가본 적이 있는가, 오랜만에 돌아온 집이 폐허 같다고 느낀 적은? 새벽에 문득 잠이 깨어 오랫동안 홀로 잠 못 이룬 적이 있는가? "어둔 방 불도 켜지 않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쌌는"(「화양연화」) 자를 그리는 시인, "다시 누군가를 집에 들인다는 일이 상처가 된다는 것쯤"(「사랑의 (무거운) 신호」), "혼자 살다보면 머릿속 불은 환히 밝힐지라도 마음 불은 내비치면 탈이" 된다(「생의 딴전」)는 것을 아는 시인의 시는 독신자의 시요, 고독한 모든 인간을 위한 시다.
해설을 붙인 최하림 시인은 말한다. "빈방에 불을 켜고 들어가는 독신의 시인은 외롭다. 그는 눈을 맞추고 말을 나눌 상대가 없다. 가진 것도 버릴 것도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빌려 말하자면 그는 지금 홀로 있을 뿐 아니라 오래오래 홀로 있어야 하며 지금 집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집을 지을 수 없다. 시인은 영원히 홀로 있는 자이며 영원히 가난한 자이므로."
"닿고 싶은 것에 닿지 못"(「어느 어두운 방에서의 기록」)하고, "데려가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른 체 데려가주지 않는" 것이 생(「이사」)이라는 것을 아는 시인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그래서 창 밖으로 목을 빼고 기다리다가도,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화분」), 어딘가로 가려 하는 당신을 붙잡지 못하고 다만 기다리는 자가 되어 길목을 쓸겠다(「소식」)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화분」 중에서
옥탑방에서 배수구를 타고 내려오는 물소리/한밤중이나 새벽에 깨어 멀거니 혼자 앉아 있게 하는 소리 (……) 흐르다 말고 혼자 올라갔다 혼자 내려오는 내 물소리 「조선족 여인」 중에서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게 아름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민다.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므로. 아주 조심스럽고 간절한 이 몸짓은 사물이나 인간을 눈여겨보고 기울이는 것, 곧 그것을 사랑하고 아끼고 가엾이 여기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리도 무겁고 슬픈 삶, 외롭고 쓸쓸한 생의 물기 어린 풍경에 한 줌 온기를 불어넣는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메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한데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좋은 사람을 만나 한 시절을 바라보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눈발을 지켜보는 일 (……)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낸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 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좋은 사람들」중에서
사진을 찍는 시인답게, 그의 시는 삶의 무늬를 그림으로 만들어낸다. 한 행, 한 행, 그의 시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음결이 인화되어 나오는 듯한 느낌과 만나게 된다.
늦은 밤 어디선가 풍겨오는 밥냄새 같은 시
이병률의 시에는 힘이 있다. 이 범상치 않은 힘을 그는 어디서 구하는 것일까. 세상이 잊고 지나쳐버린 의미를 정성스레 건져올린 그의 시의 무대는 드넓다. 약간은 어두운 조명 아래 꼼꼼히 직조된 그의 시를 통해 우리는 신선한 전율마저 느낀다. 그러나 그 전율은 곧 그의 존재론적 외침이며 흐느낌에 다름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외침과 흐느낌은 그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또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도도한 자아 발견으로 발전하면서 가슴 저리게 우리까지 울려준다. 마종기(시인)
늦은 밤 어디선가 풍겨오는 밥냄새처럼 이병률의 시는 마음의 허기를 아련하게 불러낸다. 한술 뜨고 가라고, 그 정갈한 밥상으로 이끌어 말없이 수저를 건네는 듯하다. 세상을 향해 말 건네는 일이 이토록 조심스럽고 간절할 수 있을까. 그는 누군가의 눈빛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세상에 누(累)를 끼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한 "데려가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른 체 데려가주지 않는 生"이라는 걸 알면서 끝내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하지 않음이, 붙잡지 않음이 오히려 그의 시에서 마음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의 품성에서 비롯되었을 이 수동적 태도가 능동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거기에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물기나 온기 같은 게 어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거칠고 소란스러운 언어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파동을 지닌 그의 시가 역설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그 소슬한 사랑에 힘입어서일 것이다. 나희덕(시인)
* 2003년 10월 28일 발행
* ISBN 89-8281-754-9 02810
* 사륙판 변형/136쪽/값 5,0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황문정(927-6790, 내선 213,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