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슬픔의 강을 뛰어넘는 빛나는 시어
시인은 슬픔과 절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안테나를 가진 듯하다. "성치 않은 이곳에선 건강한 두 다리로도 온전한 영혼의 무게를 떠받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에 깨달"(「물 위의 발자국」)은 시적 화자는 "질긴 목숨을 한낮 땡볕에 하얗게 말려버리고"(「어느 인형의 노래」) "벌겋게 핏발이 선, 마른 강바닥을 건너온 사람들의 분노에 대해, 모든 헛된 꿈들이 처형되는 비명 소리, 뒤틀린 기형의 꿈들이 거세당한 얘기를, 몇몇 꿈의 조직들이 암세포처럼 칼날에 묻어나와 현실이 된 얘기를, 현실이 다시 꿈이 되는 이야기"(「칼 끝에 맺힌 마지막 눈물」)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급기야 "나는 독"이라고 선언한다.
오랫동안 독을 삼켜왔다/조금씩 조금씩 먹어온 독에 의해/나는 길들여졌다 이제 치사량의/독성이 나를 살게 한다/(……)//나는 독이다,/밤새도록 허공에 떠돌던/절망의 투명한 미세 입자들이 모이고 모여/더이상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비로소 기척 없는/이른 새벽이 되어 지상에 내려앉는 독//그러나 쉽게 스며들지 못하는 독/ 「毒」 중에서
이런 시인에게 현실은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숨어드는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여서, 시인은 "병들고 짐승스런" 현실세계와 끝없이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상과 연결된 모든 안전고리를 남김없이 풀"(「구름공장의 뜨락을 산책하는 김씨」)어버리고 상상의 공간을 떠돈다. 바로 이 공간에서 작동하는 구름과 바람의 이미지는 이 시집 곳곳에 등장한다(「구름공장의 뜨락을 산책하는 김씨」,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긴 水路의 끝, 늦가을물 한 자리」 등).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홍신선은 이것이 현실세계를 벗어나고 싶은 시인의 욕망의 표지, 곧 지금 이곳의 공간을 벗어나 "극점"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소한 균열까지 발견해내는 슬프고 아픈 시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를 궁금"(「풍향계」)해한다. 그의 눈은 마음 깊은 곳에 난 실금, 사소한 균열까지 발견해낸다. 너무 예리해서 슬프고 아프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는 출발 지점일 뿐이다. "희망은 더이상 슬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그해 겨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시인은 현실에 맞서 독을 품어 단단히 무장하고 또다시 구름의 여정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탐욕스런 문명의 후폭풍, 그 뒤통수를 보는 예리한 시선
이덕규의 시를 등단 이전 처음 읽었을 때 만났던 그 남성적 체취를 기억한다. 지금도 우리 시가 지니고 있는 정서와 사유의 여성 편중과 어떤 유약성이 걱정되기도 했던 터라 그러한 그의 시와의 만남이 남달리 든든하고 신선했었다. 지금도 시의 행간을 더듬어가는 그의 의식의 더듬이는 어떤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흔들려도 사내의 냄새를 내는 팽팽한 긴장의 가시 끝에 진한 눈물 방울을 맺히게 하고 있다. 예리하다. 보이는 순간 가차없이 썩 베어낸다. 에스프리의 피가 낭자하다. 흙 속에 맨발을 묻고 사는 이 시인의 보행이 이토록 단호함을 보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毒을 품고 毒을 넘어서는 자리에 이 시인의 시가 있다. 전보다 더욱 조밀한 시어의 운용과 발견의 시력을 획득하고 있는 시의 劍法이 번득인다. 정진규(시인)
후폭풍의 뒤통수를 보는 눈! 몇 년 전 문예지에서 이덕규 시인의 「풍향계」를 처음 보았을 때 이거, 진짜 시인이 하나 나타났구나 싶었다. 내 뒤통수가 아팠던 것이다. 첫 시집 원고를 미리 읽어보았더니 이제는 저울에 올라가 있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까지 헤아리고 있다. 시인의 눈은 발견하는 눈이다. 시인의 발견하는 눈은 이윽고 땅의 가슴과 함께 온몸이 저리도록 울고 있다. 그렇다, 이 탐욕스런 문명의 후폭풍은 땅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덕규 시인은 벌써 저 앞에서 땅에 뿌리박은 삶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늘 뒷모습이다. 헌걸찬 뒷모습이다. 이문재(시인)
이덕규
1961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1998년 현대시학에 「揚水機」 외 네 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화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cloudfactory@hanmail.net
* 2003년 10월 28일 초판 발행
* ISBN 89-8281-755-7 02810
* 사륙판 변형/152쪽/값 7,0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황문정(927-6790, 내선 213,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