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외로움과 그리움이 내 곁에 있어주었다. 다정한 연인같이……
"사방팔방을 휘저으면서 겨우 살아갈 몇 푼의 돈을 손에"(「딸기」) 쥐는 시인의 삶은 고단하다. 그러나 그가 시인인 것은, 그가 늘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그리움은 생득적인 조건이어서, 가만 놔두면 자꾸 자라나는 손톱과 같다. 시인은 그 손톱을 잘라 함부로 버리지 않고 곱게 갈무리해 시로 쓴다. 또 그리움은 항상 멀리 있으므로, "하늘이어서 항상 투명"(「화조도」)해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먼 거리를 견뎌야 하는 시인은 그래서 외롭다. 그러나 "더 외로워지지 않는다면 / 그리움이 아"(「바다 선녀」)니므로 시인은 기꺼이 더 외로워한다.
문학평론가 박철화는 해설에서 "일상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일상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결합된 것이 눈물이라 할 수 있"으며 "눈물은 시인에게 있어 존재증명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밝혀놓았다. 시인은 눈물이라는 렌즈를 통해 일상의 사물과 사건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눈물 없는 눈동자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진실, 눈물」).
그 호박과 호박꽃 위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진다 / 둥근 것들, 영원히 아름다운 것들 / 빗방울 속에 호박이 기어들어간다 / 그러다 뚝뚝 땅으로 떨어진다 / 저것이 바로 씨앗이다 / 호박씨다둥근 눈물방울은 곧 생명을 담은 씨앗과 같다. 눈물의 힘을 빌려 시인은 사과와 썩은 화초호박, 호박꽃과 장미꽃 같은 주변의 사물들에서 생명을 본다. 일상의 사물들은 눈물과 함께 땅으로 떨어져 씨앗이 되고, "뻘뻘 땀을 흘리면서 올라가 / 눈동자라는 우주의 문을 여는 것이다".
― 「호박꽃」 중에서
그대의 손을 잡으면, 우리의 몸은 길이 된다
일상에서 생명의 기척을 느끼고 경탄하는 시인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 겸손함으로 시인은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과일 바구니에서, 이차선 도로 위에서, 새소리에서, 임진강에서, 노을에서, 차 지나가는 소리에서도 시인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아침상을 차리는 부엌의 소리"가 "내 생명의 박동 소리와 닮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 시인의 일상은 사랑과 경탄으로 가득 찬다. 잠들어 있는 가족의 모습이, 늦은 저녁의 두부튀김이, 아침상이, 가까이 있는 일상의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의 연인이 된다.
내 심장보다도 더 가까운 곳, / 내 눈물, 웃음보다 더욱더 가까운 곳, / 그곳에 님이 있었다 / 고마워, 내 사랑그리하여 시인은 연인과 함께 그리움이 가득한 시의 길을 간다. 그에게 시는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먼 길이자, 또 바로 가까이 있는 일상의 길이다. 애틋한 눈물이 어린, 안개에 싸인 길이다.
― 「고마워, 내 사랑」 중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먼 길은 / 앞이 안 보이는 길이다 /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의 길, / 그러나 거기에 분명히 있을 것 같은 일상의 길 / 안개 속에 서서 길을 보면 / 이 세상에서 제일 먼 곳이 보인다애린의 따듯함과 삶의 소중함을 함께 읽어내는 연가
― 「안개」 중에서
원재훈의 모든 시는 연가이다. 가족이나 친구, 이웃은 물론이고, 딸기나 호박꽃, 참외, 꽁치, 손톱 같은 하찮은 대상이라도 그의 시 속에서는 모두가 그의 연인이 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따뜻하고 진하게 배어 있다. 그것은 생래적으로 그의 몸에 나 있는 길이다. 그는 그 길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옮겨 적을 수밖에는 없다. 그것은 노래처럼 몸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다. 김기택(시인)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세계의문학』에 시 「공룡시대」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낙타의 사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 하네』 『그리운 102』, 산문집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꿈길까지도 함께 가는 가족』, 『내 인생의 밥상』, 소설 『모닝커피』 등이 있다.
원재훈
* 2003년 11월 20일 초판 발행
* ISBN 89-8281-766-2 02810
* 사륙판 변형 / 120쪽 / 값 5,0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이상술(927-6790, 내선 213, 202)
원재훈의 모든 시는 연가이다. 가족이나 친구, 이웃은 물론이고, 딸기나 호박꽃, 참외, 꽁치, 손톱 같은 하찮은 대상이라도 그의 시 속에서는 모두가 그의 연인이 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따뜻하고 진하게 배어 있다. 그것은 생래적으로 그의 몸에 나 있는 길이다. 그것은 노래처럼 몸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다. 김기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