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으로 데뷔하여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특한 색깔을 선보여온 배수아의 장편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이 출간되었다. 배반의 글쓰기라 불릴 만큼 이질적인 작품으로 독자를 당혹스럽게도, 또 즐겁게도 해온 그는 이번엔 또 어떻게 우리를 놀라게 할까.
"문학이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완성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최근 배수아는 한 문학상 시상식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덧붙여 그는 이런 생각은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했던 것이 아니라고, 2년 전쯤에야 문득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고 싶어졌으며, 그들이 진심으로 궁금했다고 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가 최초로 자신이 작가가 된 시점이 아니었나 한다고…… 그리고 그는 "그들의 책이나 글을 읽으면서 그들 예술가 자신의 이름이나 인생이나 업적이 아니라 바로 책이나 글 자체에서 원하던 것을 읽어냈다. 그들은 자신의 유일한 세계를 추구하려 애썼고, 유일한 세계는 유일한 언어를 가진다는 것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어쩌면 작가 배수아의 이런 생각이 고스란히 한 편의 소설로 녹아든 작품일 것이다. 지금까지 발표해온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했지만 그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주려 한다.
"그때 사물은 각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녁 하늘의 마지막 빛에 의지해서 나는 쓰기 시작한다."
이번 소설에서 그는 언어에 대해서, 그리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기도 하지만(그리고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이며 동시에 에세이이며, 어찌 보면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창작론이기도 하다. 그 동안 말하지 않고 작품으로만 보여왔던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소설 속 화자 나는, 그리고 배수아는 이제 말하기 시작한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에는 눈에 띄는 스토리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소설에서는 독일에 체류하던 한때 나가 사랑했던 M에 대한 기억이 그 후의 무미건조한 일상과 교차되며 펼쳐진다. M과 헤어진 후 다시 찾은 독일에서 나는 요아힘이라는 친구의 집을 방문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면서, 또 어쩌다가 성탄절 전날이나 연말을 맞아 별 생각 없이 요하임의 어머니 집을 그와 함께 방문한다거나 파티에 참석한다거나 하면서 소일한다. 소설의 많은 부분은 나가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서 회상하는 듯한 그와 같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의 나열이다. 그리고 거기에 M과 함께했던 시간의 기억이 끼어든다. 아니, 거꾸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찌 보면 M에 대한 기억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은 M과 함께 음악을 듣던 나의 기억과 음악에 대한 관념적인 진술로 시작해서 M에 대한 언급으로 끝나고 있고, 그 중심에는 M과의 사랑과 이별의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M과 헤어진 후 서술되는 독일에서의 일상이나 한국에서의 현재는 오히려 그 중간에 끼어드는 일종의 후일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나는 M과 헤어진 후 독일을 다시 방문한 그때의 시점에서 그와의 사랑의 기억을 조금씩 들추어낸다. 나가 요아힘과 산책을 하거나 대화할 때, 그리고 그가 여행을 떠난 후 홀로 그의 집에 남아 산책과 책읽기, 음악 듣기로 소일할 때, M에 대한 기억은 나가 그때그때 접하는 음악, 거리 풍경, 책의 한 구절, 대화 내용 등에 의해 촉발되어 그로부터 하나둘 자연스럽게 풀려나온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파편적으로 끼어들던 그 기억의 영역은 소설이 전개되면서 점차 확장되어 나중에는 다른 곁가지들을 밀어내고 소설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독일어 개인교사와 학생으로서의 첫 만남, 보통의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M의 독특한 교습방식 때문에 겪었던 당혹스러움, M과 가까워지면서 새로 소개받은 독일어 교사 에리히에게 M에 대한 글을 제출한 일, 남아 있는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한국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나와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것을 못 견뎌하는 M과의 갈등, 에리히가 연 파티에 다녀오는 길에 M에게서 예상치 않게 듣게 되는 그와 에리히의 육체관계에 대한 고백과 그로 인한 결별 등의 이야기가 나의 기억 속에서 펼쳐진다.
이렇듯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모티프가 사랑의 기억이라고는 하지만, 이 소설은 통상적인 연애소설이나 사랑을 소재로 취한 여타 소설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사랑 이야기에 흔히 개입되는 여차여차한 우여곡절이나 두 연인이 함께 겪을 법한 미묘한 감정의 곡선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아니다. 물론 M과 만나고 헤어지게 되기까지의 사연이 회고적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고 M에 대한 나의 감정선이 도드라지게 부각되는 장면도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소설에서는 특이하게도 정작 M과 함께하는 많은 장면이 상당 부분 움직임이 완만한 미장센 안에 갇혀 마치 윤곽이 흐릿한 정물화처럼 포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술자의 목소리는 그 화면의 안도 바깥도 아닌 경계에서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이 소설은 마치 M을 정신적 질료로 하여 그에 대한 회상에서부터 풀려나오는 언어나 음악에 대한 생각과 예술 텍스트에 대한 개인적 논평을 펼쳐놓는 에세이처럼 읽히고, 또 실제로 소설 전체가 인물이나 사건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에세이적인 형식을 띠고 있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제목이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나는 단지 오류와 혼란을 피해가기 위해서 쉽게 씌어지고 쉽게 읽히는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읽기가 쉽지 않다. 꺼끌거리고 서걱거리고 부딪친다. 수없이 많은 부문장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의 글은 그러나, 충분히 독특하고, 개성적이다.
"진지한 정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
"질문이 많은 사랑은 늙은이처럼 제 안에서 서서히 쇠락해져갔다."
"그 밤이 지나고 나자 세계는 그 자신의 형식을 찾았다. 나는 행복이나 만족이나 열정이나 자아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 소설에서 그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정신에 대해, 사랑에 대해, 언어에 대해, 그리고 음악에 대해, 음악적인 것에 대해……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가 음악으로만 대화했다면 일은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몰랐다. 음악은, 그것이 무엇에 바쳐졌건 개의치 않는다. 음악의 가치는 결코, 대왕의 이름으로도, 지불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한없이 용서하면서 동시에 무시하고 능가한다. 음악은 불만과 결핍과 갈증으로 가득한 인간의 내부에서 나왔으나 동시에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응시한다. 혹은 인간의 너머를 응시한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 응시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 언어와 음악은 그렇게 공통적이다. 그러나 음악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입을 다문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인간은 단지 나는 음악을 듣는다 라고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나를 사로잡을 무렵, M이 나에게 말한 대로,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본문에서
배수아는 "소설가이기보다는 작가이고 싶다"고 말한다. 문학이란 본래 순수한 자유인을 위한 나라, 무정부주의자들을 위한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엄격함은 언어의 궁극적인 해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형식의 파격이나 혁명이 아니라, 글을 대하는 모든 이들의 의식의 자유로움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조금 더 자유로워지기를, 의식의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초판발행 | 2003년 12월 29일
* ISBN 89-8281-778-6 03810
* 145*210 | 200쪽 | 값 8,000원
"그때 사물은 각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녁 하늘의 마지막 빛에 의지해서 나는 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