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사색의 깊이와 넓이
저자 배병삼 교수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인 동시에 충남대, 경희대, 성심외국어대 등에서 『논어』를 강의하며 『한글세대가 본 논어』(문학동네)를 펴낸 『논어』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서양 정치학과 동양 고전을 아우르는 저자는 스스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을 넘보고, 학문의 길을 걸으면서 문사의 꿈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여태까지 걸어온 내 길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사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사이 또는 고전과 현대의 사이, 그 샛길일 따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샛길은 누구도 쉽게 가려 하지 않는 길이기에 어떤 길보다도 더 풍성하고 넓다. 이번에 그가 펴낸 산문집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는 이러한 저자의 폭넓은 이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만만치 않은 사유의 깊이와 문학적 감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스테인리스 대접에서 『논어』까지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打草驚蛇)란 변죽을 울려 중앙을 흔든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일상과 세태와 문화에 관한 주변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시대의 문화와 문명의 핵심을 반성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나 동네 목욕탕의 등밀이 기계 같은 주변의 소소한 물건에서 씨랜드 참사와 IMF 경제위기, 월드컵 등 시사적인 주제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우리 주변의 다양한 현상과 사물들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어 공자와 맹자, 퇴계와 삼국유사를 참조해가며 시대에 대한 깊은 성찰과 비판을 수행한다.
예컨대, 저자는 동네 목욕탕에 놓인 스테인리스 대접에서 디지털 시대의 몰역사성을 읽어내고, 포장마차에서 멍게를 써는 멍게장수의 솜씨에서 학문의 도(道)를 엿본다. 하우스 채소를 맛보며 조급증이 만연한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고, 휴가철 해수욕장의 풍경에서 정치의 정도(正道)를 논하기도 한다. 때로는 큰어머니의 죽음에서 농경시대의 종말을 안타깝게 추억하기도 하고, 고향의 추석 풍경과 겨울나기 풍습을 아련하게 회상하기도 한다.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스테인리스를 둘러싼 명상은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한 사색이 담긴 글들이며 2부 일상과 비상은 주변의 사물에 대한 단상들을, 3부 고전의 주변은 정치학과 동양사상에 대한 성찰을 모았다. 길지 않은 글들이지만 일상에 대한 재치 있는 독법과 섬세한 문학적 감수성,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이 글 곳곳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풀숲 곳곳에 흩어져 있는 낯설고 비상한 삶의 무늬들
저자의 목소리는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날카로우며, 때로는 감상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색창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산문집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균형잡힌 이성의 안정감이다. 그는 숨가쁜 시대의 변화를 무턱대고 비난하지도, 옛 성현의 말씀을 고리타분하게 옹호하지도 않는다. 다만 동양의 고전들에서 배운바, 일상적인 삶을 비상(非常)하게 또 낯설게 볼 것을 누누이 권할 따름이다.
이 길은 중용(中庸)의 길이 그러하듯, 새하얀 작둣날 위에 서기보다 더 힘든 길이며, 저자가 말하듯 "어둑한 뒤안길이요 또 풀숲으로 가득 차서 걷기에도 힘든 길"이다. 요컨대 그의 산문(散文)은 풀숲으로 가득 찬 이 중용의 소롯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낯설고 비상한 삶의 무늬들과도 같다.
인문학적 이성의 향기가 배어 있는 숙수(熟手)의 글쓰기
배병삼의 산문은 ‘인문학적’ 에세이다. ‘인문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하면서 축적된 지식과 한편으로는 한국의 시와 소설을 종단하면서 쌓인 감성을, 현실이라는 텍스트 속에 훌륭하게 버무려놓기 때문이다. 이런 근본이 있기에 그의 에세이는 과거와 현재, 좌와 우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며, 정보화시대라고도 불리는 이 비이성적 시대에 인문학적 이성(理性)의 지표를 찾아간다. 강단에서는 『논어』를 가르치고 연구실에서는 정치학을 모색하는 배병삼의 균형 있는 에세이는 이미 ‘날것’의 싱싱함을 넘어 발효의 미학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하응백(문학평론가)
우리 삶 주위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중에는 타자기, 흑백사진, 완행열차 등과 더불어 글읽기의 즐거움도 있다. 어찌하여 글읽기가 점점 노역으로 변해가는가. 아마 우리가 아직 이 책의 저자와 같은 글쓰기의 고수를 만나지 못해서인 듯하다. 삶의 다채로운 굴곡, 주름, 단층들을 독특한 울림과 떨림의 언어들로 훑어내는 숙수의 심급을 어찌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이 책은 그 글쓰기의 고수가 신명나게 펼치는 한바탕의 페스티벌이다. 나는 그야말로 경탄 속에서 이 책을 단숨에 내리 읽었다. 아, 얼마 만이냐. 줄어드는 페이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늠하며 글읽기에 몰두하는 체험이. 이왕주(부산대학교 교수)
* 2004년 1월 8일 발행
* ISBN 89-8281-786-7 03810
* 국판 변형 / 320쪽 / 8,8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이상술(031-955-8865, 8864)
배병삼의 산문은 "인문학적" 에세이다. "인문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하면서 축적된 지식과 한편으로는 한국의 시와 소설을 종단하면서 쌓인 감성을, 현실이라는 텍스트 속에 훌륭하게 버무려놓기 때문이다. \n\n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