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진계를 대표하는 지성, 강운구의 사진산문집 『시간의 빛』 출간
한국 작가주의 사진가 1세대이자 세밀한 필치로 우리 고유의 풍경을 그려냄으로써 가장 한국적인 질감의 사진을 남기는 작가로 평가받아온 강운구의 사진산문집 『시간의 빛』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강운구는 길에서 만난 우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빛과 환희의 시간을 그대로 사진에 담아내면서, 그와 함께 순간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짧지만 묵직한 단상들을 펼쳐 보인다. 2000년 9월부터 2002년 5월까지 『시사저널』에 격주로 연재한 글과 사진을 묶은 이 책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 늘 스멀거리고 있는 이미지"를 찾아서 떠난 여행, 길에서 보낸 수많은 밤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이라도 쉬어갈 수 있는 편한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
일찍이 언론에 몸을 담아 세상을 보는 눈과 시대를 읽는 눈을 키웠던 강운구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 시대를 살아내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을 담아 진한 휴머니즘이 느껴지는 그의 초기 사진에서부터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이번 풍경 사진까지, 지난 30여 년간 일관되게 견지해온 그의 올곧은 작가정신은, 독자들이 보는 즐거움을 넘어선 그 무엇을 느끼고 또 반성하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또 변화하길 강요하는 요즘, 이 땅에서는 풍경마저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 저자가 말하듯, 온 나라가 시끌벅적 공사판이며 산과 들이 신음하는 오늘날 한갓지고 빼어난 경치는 없다. 어제의 길은 더이상 오늘의 길이 아니며, 오늘의 풍경은 내일이면 이미 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작가는 눈이라도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풍경을 보여주고자 했고, 그 풍경을 넘어서 뭔가 느끼게 할 수 있는 것도 있다면 기쁘겠다고 했다. 사진에 담긴 한국의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에는 시간과 빛이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그 빛의 온기는 보는 사람의 굳은 마음을 녹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사진을 찍는 일은 시간과 빛과 자기 자신의 인내심과 싸우는 작업이다. 30년 넘게 사진을 찍어온 노작가의 작업은 어떨까? 강운구의 사진 찍는 여정에 여러 번 동행한 소설가 김훈의 이야기에 따르면, 강운구는 셔터 누르기를 무척이나 아끼는 사진작가이다. 원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그는 카메라를 들이대기 전에 오랫동안 "세상의 언저리를 어슬렁거리면서 그 세상을 받아내야 하는 자신의 위치와 각도를 탐색"한다. "그러다가 빛의 밀도가 사위고 시간의 눈금이 성글어지는 어느 하오 무렵을 가려, 그는 주머니 속을 부스럭거리며 카메라를 꺼내 이리저리 빛을 헤집어가면서 두어 번의 셔터를" 누른다. 이런 오랜 서성임을 거쳐 인화된 사진 속 사물들은 트리밍을 하지 않고도 완벽한 구도 안에 포착되어 있다(이 책에 실린 사진의 검은 테두리는 트리밍을 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다). 심상과 실상의 차이를 잘라내는 작업 없이 빛과 사물과 공간만으로 충분히 완벽한 구도를 잡아낸 사진에서 과연 원하는 사진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기다리고 견디면서 대상을 응시하는 대가의 숨결이 느껴진다.
길에서 만난,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의 자연
팥배나무 열매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빗방울까지 놓치지 않는 사진가의 눈. 그 예리함과 애틋한 마음으로 사진에 담아낸 우리의 자연 풍경은 간결하고 시적인 언어와 어우러지면서 더욱 아름다움을 발한다. 그러나 작가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특히 자연 앞에 "당당하고 교조적인" 인간들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봄이다 싶어 두꺼운 겨울옷들을 성급하게 벗어던졌더니, 변덕스러운 봄은 눈을 흩뿌리고 매운 바람 날린다. 저자의 발걸음은 먼저 봄을 알리는 산수유꽃이 무리진 전남 구례군 산동면으로 향한다. 노란빛 흐드러지는 산수유꽃, 바람에 그윽한 향기를 실어 보내는 춘란, "겨울잠에서 덜 깬 산자락에 펼쳐진 그 자욱한 봄안개 같은" 붉고 흰 매화들, 황사에 휩싸인 영취산 자락의 상수리나무 숲…… 사진 속 봄의 향기에 취했다가도 "자태 귀하고 향내 좋은 것을 결코 두지 않고" "숨막히게" 하는 세인을 향한 쓴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다. 이력으로 삼기 위해서 꼭대기나 탐하는 "피크 베거"들, "자연 보호" 간판들로 오히려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에게 띄우는 엄중한 메시지 앞에서는 숙연해질 수밖에.
여름빛은 도처에 있다. 바람에 물결치는 보리밭의 푸른빛, 농익은 복숭아의 화사한 붉은빛. 쟁반에 소복이 담긴 어린 차 이파리의 연둣빛, 땡볕에 익어가는 수박의 빛깔. 여름의 빛은 이글이글 타오르다가 또 서서히 저문다. 그러나 아름답고 건강한 여름 풍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정에 핀 악의 꽃"이라고 비유한, 고창읍 산꼭대기의 쓰레기 매립지, 무더기로 버려지는 과일들. 이런 것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심정은 참혹하다. 안타깝고 속이 쓰리다. 우리가 자칫 무심하게 지나치는 풍경도 저자의 카메라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그의 사진이 이렇게 말한다.
가을걷이 끝난 들판은 여백 같다. "영 물러갈 것 같지 않게 난리를 치던 여름이, 추석이 가까운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서둘러 사라진다." 가을이 왔음을 알아차린 식물들은 열매를 여물게 하는 데 정성을 쏟는다. 추수를 마친 들판, 다 익어 뚝, 하고 벌어진 알밤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매달린 주홍색 감들, 바야흐로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다. 그러나 이뿐일까? 인간이 길을 내기 위해 무자비하게(자연에게는 폭력이나 다름없다) 파헤쳐진 산, 그래서 절벽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 나무들, 풍년이 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농부들의 시름, 점점 외국의 풍경으로 바뀌는 우리의 시골, 논과 밭. 주변의 살아 있는 많은 나무들보다 쓰러진 나무 한 그루에 신경이 더 쓰인다는 저자의 말이 더없이 큰 울림을 준다.
겨울 짙푸른 새벽 홀로 만나는 눈 천지. 새벽녘 싱그러운 꽃처럼 막 피어올랐다가 첫 햇살을 받자마자 부신 빛을 내면서 한꺼번에 꽃잎처럼 흩날리면서 스러지는 상고대. 추운 겨울바람에 볼이 발갛게 언 채로 아이들이 연을 날리는 풍경. 눈 속에 피는 동백, 바람이 먼저 지나가는 겨울바다. 그리고 저자는 "빛 밝은 푸른 아침으로부터 붉은 저녁놀 사이에" 있는 긴 시간의 켜가 품은 단단한 희망의 씨앗을 말한다. 그리고 "번쩍이던 아침빛이 휘황한 놀빛으로 바뀌어 어둠에 잠기"는 것처럼, 새로운 희망은 되풀이된다고.
이 책에 실린 사진은 거의 대부분 말이 없는 자연을 찍은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뜻밖에도 수천 가지의 언어로 다가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거기에는 조금씩 다르게 완성되는 빛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녹이는 따뜻한 느낌의 빛. 이 빛과 함께 공들여 탄생시킨 사진들, 그리고 성찰과 반성의 깊이는 긴 여운을 줄 것이다. 그래서 문득 익숙한 풍경이 달리 보일 때, 다시 이 책을 펴들게 되지 않을까?
덧없는 것들의 영원함, 생멸을 거듭하는 현재의 빛을 잡아내다
강운구의 셔터는 빛과 시간을 고정시키지 않고, 강운구의 파인더는 세상을 사각형의 틀 안에 가두지 않는다. 그는 흘러가는 것들을 흘러가게 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 속에서는 덧없는 것들이 영원하다. 그의 사진집 중에서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경주 남산』의 어떤 페이지들은 폐허에 내리는 빛들로 고요하다. 계림의 숲이나 신라 왕릉의 구부러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내리는 빛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빛들은 고대의 빛이며 현재의 빛이다. 그의 글이 무너지고 으깨지는 세상을 슬퍼할 때도, 사진 속의 빛은 그 슬픈 세상의 안쪽을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그 빛은 언제나 생멸을 거듭하는 현재의 빛이다.
김훈(소설가)
*2004년 1월 27일 발행
*ISBN 89-8281-777-8 03810
*사륙판 변형/256쪽/값 18,000원
*담당편집: 차창룡(031-955-8866) 황문정(031-955-8863)
한국 사진계를 대표하는 지성
길에서 만난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의 자연을 담아내다
강운구의 셔터는 빛과 시간을 고정시키지 않고, 강운구의 파인더는 세상을 사각형의 틀 안에 가두지 않는다. 그는 흘러가는 것들을 흘러가게 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 속에서는 덧없는 것들이 영원하다.-김훈(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