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기억이 뒤엉킨 가슴 저린 물결무늬
해설을 쓴 평론가 김형중은 한동림의 소설을 ‘되찾은 시간’에 대한 기록들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한동림의 소설들은 억압되어 있던 기억과 상처가 현재와 화해하고 구원되는 과정의 기록이다. 작가는 그 과정을 견고하고 치밀한 소설적 구성과 담담하지만 깊은 고통을 내포하고 있는 어조로 풀어낸다. 기억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난 기억은 현재를 포함한 모든 시간을 헝클어뜨린다. 화해는 손쉽지 않고, 구원의 길은 막막하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가 서로 스며들면서 이루어내는 무늬는 긴 여운을 남기는 파장이 되어 번져나간다.
「귀가」에서, 어느 저녁 퇴근길 버스에서 한 아낙과 불구인 그의 아들을 본 ‘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불구였던 형을 떠올린다. 형에 대한 어머니의 자책감 섞인 애정은 차라리 불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만큼 뿌리깊은 질투와 원한의 감정을 낳았다. 기억 속의 어머니와 형의 모습이 버스 안의 아낙과 그의 아들과 겹쳐지면서, ‘나’는 그 앞에서 불편하고 당혹해한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새벽 새」의 영훈은 자신의 송별식 장소인 단란주점 ‘환희’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은주와 보낸 하룻밤의 기억을, 죽음 앞에 선 은주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되살려낸다. 현재의 단란주점 ‘환희’와 과거의 다방 ‘환희’, 길가에 핀 산사나무 꽃과 은주가 들려준 산사나무 이야기, 현재 그를 유혹하는 여자에 대한 거친 욕정과 과거 은주에 대한 서툰 욕정. 이렇게 기억은 모습을 바꾸어 현재에 되살아나고, 현재는 망자의 혼을 부르듯 기억을 부른다.
「피어나는 산」 역시 마찬가지다. 산사에서 목불을 깎는 평섭이 어느 날 보았던 수원댁이라는 여자와 장영감이 주절거리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자가 서로 겹쳐지고, 다시 평섭이 눈보라 속에서 구한 낯선 여자의 모습이 그 위에 덧씌워진다. 그리고 장영감이 여자를 위해 깎았던 목불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완성되는 평섭의 목불로 되살아난다.
「핏빛 바다」의 기억은 더욱 극적이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주인공 명한이 진술하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기억은 아버지와 똑같이 되어버린 현실의 형을 기억 속에서 아버지로 치환하는 데까지 이른다. 소설은 그 사실이 밝혀지는 과정을 미스터리에 가까운 형식으로 엮어내고 있다.
이렇듯 한동림의 소설들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엇갈리면서 자아내는 겹겹의 무늬들로 가득 차 있다. 과거의 기억에는 대개 가족과 얽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으며, 그 죽음은 기억과 함께 호출되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처럼 삶을 짓누른다.
죽음 저편에서 반짝이는 희미한 운명의 불빛
난만하게 뒤엉킨 기억과 현재를 지나, 한동림의 소설은 힘겹게 삶을 되찾는다. 그것은 기억과 손쉽게 타협하거나 죽음을 삶 바깥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포함한 기억을 긍정하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길이다. 「유령」에서, 어머니에게 곧 닥쳐올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숙 앞에서 진형은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자신의 기억을 떠올린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가던 도중 낯선 여자와 살을 섞었던 기억이 할머니의 시신 위에 어른거리면서 죽음과 욕망이 고통스럽게 뒤엉켜들고, 마침내 모든 기억은 물너울처럼 일렁거리는 할머니의 유령으로 화한다. 기억은 용서되거나 구원되지 않는다. 기억에 스며 있는 죽음의 운명은 순순히 삶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의 기억은 “물너울처럼 일렁거리며” 조용히 삶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 진형의 이야기를 들은 인숙이 마침내 “아기를 낳고 싶어”라고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로 말하듯, 한동림의 소설은 죽음과 삶을, 그것이 한덩어리로 얽힌 운명 전부를 긍정하는 데 도달하게 된다.
「조난」에서 교차하는 두 개의 이야기가 그 길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끝없이 되풀이되어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밀어올리는 신화 속의 시시포스가 산 아래에서 그 ‘예정된 배신’을 긍정하는 데 이르는 것처럼, 또 눈보라 속에서 조난당한 현숙이 계곡 한자락에서 박선배의 죽음을 포함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데 이르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운명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걸어가는 그 둘의 모습은 소설가의 운명을 걸머지고 소설의 정도(正道)를 걸어가는 작가 한동림의 모습과 겹쳐지고 있다. 주인공 현숙과 시시포스는 한동림의 또다른 모습이다. 어쩌면, 눈보라에 휩싸인 무덤 같은 계곡, 죽음의 문턱에서 현숙이 목격한 산봉우리의 희미한 불빛의 반짝임, 그것이 곧 그의 소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결벽에 사로잡혀 강박에 시달린다. 그렇지 않아도 소란스러운 세상에 또하나의 소음을 보태는 것은 아닐까, 하고 움츠러들곤 한다. 만약 소음에 불과할 뿐이라면, 그것은 소멸에 대한 섣부른 각성으로부터 비롯된,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맞서려는 가망 없는 발버둥이자 어리광일 터이다. 정녕 그러하다면, 잊혀진 산사에서의 기나긴 겨울 동안 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연민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리라.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끝내 소멸과 망각으로부터 티끌만큼도 자유로워지지 못한 채 무겁고 지친 몸뚱이를 이끌고 이름 모를 시공을 표류하고 있는 것이리라.(「작가의 말」에서)
삶의 의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한동림의 소설 속에는 삶과 죽음이 동거한다. 삶은 죽음을 부르고 죽음은 삶을 끌어안는다. 한동림의 소설들은 삶의 의미를 캐묻기 위해 그토록 집요하게 죽음의 언저리를 배회한다. 그의 소설에서 낯선 이방인처럼 삶 속으로 스며들어와 삶을 뒤흔들고 삶을 무너뜨리고 삶을 캄캄한 절망의 나락으로 내팽개친 죽음은 마침내 다정한 친구처럼 삶을 비로소 삶 쪽으로 이끌고 간다. 한동림의 소설은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와 의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가슴 저릿하도록 처연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그 어조 속에는 오랫동안 소설과 씨름해온 작가의 숙성된 열정과 고뇌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읽어나갈수록 우러나오는 그의 소설의 깊은 맛은 그 숙성된 시간의 무게에 비례하는 것이리라. 박혜경(문학평론가)
한동림의 주인공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 시간이란 예외 없는 ‘비상사태’이다. 언제, 어떻게, 공습경보도 선전포고도 없이 구원받지 못한 기억들의 융단폭격이 가해질지 알 수 없는 상태, 한동림의 주인공들은 그런 상태를 산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기억에 들린 자들이다.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유폐당했던 괴물은 시간에 파열이 생기기를, 그리하여 의식 속에서 당당하게 구원받기를 절치부심 기다려왔던 것이다. 김형중(문학평론가)
* 2004년 2월 5일 발행
* ISBN 89-8281-791-3 03810
* 신국판/272쪽/값 8,5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031-955-8865), 이상술(031-955-8864)
한동림의 소설은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와 의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가슴 저릿하도록 처연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박혜경(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