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많은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이후 『코카콜라 애인』 『사슴벌레 여자』 『미란』 『눈의 여행자』 등 연이어 장편만을 발표해온 윤대녕이 네번째 창작집을 묶었다. 오 년 만에 출간되는 창작집 『누가 걸어간다』에는 2003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찔레꽃 기념관」을 포함, 총 여섯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등단한 지 십오 년,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감동과 여운은 여전하지만 훨씬 깊어지고 넓어진 그의 소설을 만날 수 있다. “윤대녕은 보다 성숙한 의식과 다양한 앵글을 가지고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인 정체성의 위기 혹은 상실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이남호, 문학평론가)
「흑백 텔레비전 꺼짐」은 자아를 상실한 한 여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새천년을 맞이하여 우리 현실의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혼탁한 정치 탓으로 존재론적 안정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라고 과거를 진단하다. 또 새천년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흥분이 마치 결혼식 날 사라진 신부처럼 좌절감만 남겼다고 진단하며 새천년 역시 과거의 우울한 역사가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흑백 텔레비전처럼 답답했던 지난 세기의 삶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새천년의 삶 또한 흑백 화면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냉정한 인식은, 새천년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흥분의 안개 너머 현실의 실제 모습을 보게 해준다.
「무더운 밤의 사라짐」은 백화점에서 옛 애인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우연히 가까워지게 된 그녀와 나는 몇 번의 만남 뒤 함께 산 속 호숫가에 있는 호텔에서 며칠을 보낸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나를 떠나버린다. 십수 년이 지난 이제야 그녀는 고백한다. 처음 함께 밤을 보내던 날 그녀는 자신도 잘 모르는 한 남자를 보았고, 내가 아닌 그와 사랑을 나누었으며, 그를 잊지 못해 나를 떠났던 것이라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를 만나기 위해 봄이면 그곳을 다시 찾았다고……
「무더운 밤의 사라짐」은 독특한 상상력으로 인간관계의 불완전성과 소외, 그리고 그 속에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누가 걸어간다」의 배경은, 갈대밭이 펼쳐져 있는 임진강변의 한 시골 마을이다. 이혼한 남자와 독신 여자. 남자는 위암 진단을 받은 후 회사에 병가를 내고 피신하듯 시골 마을로 들어왔고, 한때 강남 학원가의 유명한 강사였던 여자는 어느 날 아침 “둑이 터진 것처럼” 문득 눈물을 쏟고는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혼과 위암에 패배한 인생의 남자와, ‘첩의 딸’이라는 팔자에 패배한 인생의 여자. 남자와 여자는 동병상련의 처지로 서로 가까워지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지는 못한다.
두 남녀의 상황을 보충해주는 또다른 남녀가 있으니 시골 미장원 아가씨와 탈영병이 그들이다. 그들은 갈대밭에서 사랑을 나누고, 함께 서울로 가서 살림을 차릴 것을 약속하지만 탈영병은 결국 마을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갈대밭에서 군인들의 추격을 받는다. 출구 없는 인생들. 「누가 걸어간다」는 출구가 봉쇄된 삶 속에서 자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03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찔레꽃 기념관」의 남자는 이혼 경력이 있는 마흔셋의 소설가이고, 여자는 지금은 폐업상태지만 한때 잘 나가던 서른셋의 방송작가이다. 여자는 첫사랑에 빠지던 스물셋에 오피스텔 부근에서 찔레꽃의 환영을 본 후 지금까지 그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 그리고 비 오는 밤 찔레꽃을 보러 남산까지 남자를 데리고 간다. 남자 역시 대학교 때 줄기차게 <찔레꽃>이란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다. 시인이 살던 집 주변에 환하게 피었던 꽃, 가난한 선비들의 삶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었던 찔레꽃은, 이 소설에서 문학적 가치를 상징한다. 남자와 여자가 사는 서울이라는 삶의 공간에 찔레꽃이 없다는 것은, 곧 문학적 가치가 더이상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음을 뜻한다. 「찔레꽃 기념관」은 문학적 가치가 무시되고 돈만이 소중한 가치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정체성의 위기에 처한 예술가의 방황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황폐한 문화적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전편을 감싸고 있는 찔레꽃 향기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사원이자 근원적 향수이면서 또한 자신의 꿈을 서서히 낮춰가는 자의 수치심과 절망감, 삶의 남루함을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가 불러온 찔레꽃 향기로 인해 불화하는 삶과 문학은 비로소 형태를 갖추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아름다운 문학적 공간과 서술이라는, 그의 문학적 세계를 여전히 옹글게 견지하면서 한걸음 성큼 내딛은 이 작가의 변화의 의미를 반갑게 받아들이며 수상작으로 결정한다. - - 2003년 이효석문학상 심사평에서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에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무작정 걷는 남자와 타인의 시간을 사는 남자. 걷는 행위와 타인의 시간을 사는 행위는 결국 잃어버린 자신의 존재를 되찾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삭막하고 비인간적인 일상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은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걷는 남자나 시간을 사는 남자나, 또 금요일 밤에 세 시간씩 사라지는 여자나 모두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걷는 남자의 이러한 판단은,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적 삶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겪고 있는 박탈감과 존재 상실감,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노력들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올빼미와의 대화」는 아내가 친정에 간 후 아파트에 혼자 남게 된 남자가 한밤중에 걸려온 올빼미 사내의 전화를 받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 내용이다. 올빼미 사내는 남자가 자신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 누구냐고 묻는 남자에게 그는 대답한다. “나는 너야, 그러므로 너는 나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찾아나선다는 것은 흔히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기 바로 전날 밤, 그는 일산까지 올빼미 사내를 만나러 가지만 결국 만나지 못한다. 그는 과거의 자아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며, 아울러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혼란스런 현실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남자가 자기를 찾으러 과거의 추억을 더듬는다는 이 이야기 속에서 올빼미 사내와의 통화는 결국 잃어버린 자아와의 통화이다. 결국 「올빼미와의 대화」는 오늘날 우리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의 한 국면을 흥미롭게 보여주기도 하는 작품이다.
어느 날 새벽, 윤대녕에게 고요하게 다가온 불덩이는 그의 손 안에서 더욱 크게,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다. 『누가 걸어간다』는 그 싸늘하고도 뜨거운 불의 기운을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그 오래된 새벽, 오련한 고요함이 찾아와 밖에 나가보니 웬 낭인 하나가 눈을 맞고 서 있었다. 그는 숯불처럼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불의 공기를 그는 마당 한가운데 가만히 내려놓고 나서 스스로 발자국을 지우며 대문 밖으로 사라져갔다. 마당은 태초의 적막 속에서 화염으로 부시게 타오르고 사방에서 새벽닭들이 깨어나 다투어 울었다. 문학은 내게 그렇게 왔다. - - ‘작가의 말’에서
서늘하게 중첩된 이미지들이 내뿜는 빛, 특히 밤의 푸른빛, 존재의 밑뿌리를 건드리려는 생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적막한 탐구, 여자와 여행으로 상징되는 낭만적 기운의 그 천진함, 게다가 뛰어나게 잘 조직된 비유적 언어…… 윤대녕의 소설을 읽고 나면 나는 늘 몇 권의 좋은 시집을 한꺼번에 독파한 듯한 생각이 든다. 이 명민한 소설가에게 빠져드는 순간, 독자들은 스스로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가는 공간은 쓸쓸한 자들에게는 무서운 매혹이요, 나태한 자들에게는 매운 회초리이기 때문이다. - - 안도현(시인)
* 초판발행 | 2004년 3월 18일
* ISBN | 89-8281-805-7
* 신국판 | 328쪽 | 8,800원
그 오래된 새벽, 오련한 고요함이 찾아와 밖에 나가보니 웬 낭인 하나가 눈을 맞고 서 있었다. 그는 숯불처럼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불의 공기를 그는 마당 한가운데 가만히 내려놓고 나서 스스로 발자국을 지우며 대문 밖으로 사라져갔다. 마당은 태초의 적막 속에서 화염으로 부시게 타오르고 사방에서 새벽닭들이 깨어나 다투어 울었다. 문학은 내게 그렇게 왔다. - - "작가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