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어두운 밤의 세계, 사악한 문명의 세계로 그려내는 박상우의 새 장편소설 『가시면류관 초상』이 출간되었다. 『까마귀떼그림자』 이후 이 년 만의 이 신작장편에서 박상우는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이미지를 마침내 풀어냈다고 이야기한다.
『가시면류관 초상』은 23년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이미지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 23년 전 겨울, 그것을 세례처럼 받아들이던 남가좌동 언덕 밑 풍경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해질 무렵, 나는 언덕 밑에 서서 언덕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전율할 만한 에너지의 정체를 나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예술적 영감이라는 확신만으로 나는 작가가 되었고, 작가가 된 이후에도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꽤나 고심했었다. 하지만 이미지에서 이야기의 싹이 나고 그것이 자라 소설로 열매 맺히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결국 23년이 지난 뒤, 농익은 이미지 해탈처럼 소설은 완성되었다. 이미지가 소설로 변하는 과정에 숱한 변화와 뼈저린 세월이 동원된 셈이다. 내 청춘을 제물 삼아 이 소설이 완성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 나는 내가 풀어낸 이야기를 읽고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 나를 사로잡고 있던 이미지가 비로소 언어로 해독된 때문이었다. 죄악을 두려워 말라, 죄악을 두려워 말라...... 아무려나 23년 만에 해독된 23년 전의 이미지는 내 소설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죄악을 통해 스스로 진화하고자 하는 인간의 행보에 빛의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일. --작가의 말
절망의 예언서처럼 어둡게 채색되어 있는 죄와 구원의 풍경! 20대 후반의 유인하는 세상을 어둠으로 인식하는 인물이다.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최초의 세계인 가정은 복잡하기만 하다. 부모는 이혼하고 아버지가 다른 형이 하나 있다. 어머니는 갓 스물에 미혼모가 되고, 후에 유인하의 아버지를 만나 그와 그의 동생 정하를 낳았지만 가정은 행복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지옥 같은 가정의 음울한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머니가 데려온 형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출하고, 아버지는 주말마다 술과 여자로 난장을 벌이고, 어머니는 이기심과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 독설을 퍼붓는다. 주인공은 그때마다 자신의 몸에 독이 퍼지고 있음을 느낀다. 동생의 입대 전날, 인하는 동생과 함께 카오스라는 카페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때부터 그의 어둠은 가속도를 붙여 그의 파괴를 재촉한다. 그곳에서 그는 사탄의 이름인 세이턴(satan)이라는 신비로운 여성을 만나고,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이끄는 힘을 이기지 못한다. 그에게는 어떠한 희망이나 밝은 소망도 모두 위선과 허위로 보인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듯 그를 대하는 여성에게서 모성의 역겨움을 느끼고, 아버지의 새로운 여자친구인 미성년자 은지에게도 어떠한 동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동생이나 16년 만에 돌아온 형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에게 어둠과 파괴를 긍정하는 세이턴은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로 느껴진다. 그즈음 그에게는 일시적인 기억상실이 일어난다. 그런 그에게도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나지만, 그의 운명의 여인은 군에 간 동생의 애인 모란이었고, 사랑의 방식이 곧 증오의 표출인 그에게는 파국이 밀어닥치기 시작한다. 그는 동생처럼 사랑의 힘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 아니라, 어둠에 집착하고 오히려 이를 끌어안는 인물이다. 결국 모란은 떠나고 동생은 권총자살을 하고, 어머니는 형의 아버지인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선생과 결혼을 선언하고, 아버지는 얼마 후 후두부가 함몰된 변사체로 발견된다. 한바탕 지옥이 종말로 치달은 후에 그는 카인과 아벨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발견하고 마지막 혼을 다해 자신의 기록을 남기고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에게 놓인 새로운 길을 인식한다. 그는 참담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종말을 통해 부활할 수 있다는 구원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다.
유인하가, 혹은 박상우가 찾아낸 구원의 길이 과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줄지 이제 우리가 그를 주목해볼 일이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로부터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조성기와 이승우의 소설들이보여준 주제의식과도 다른 새로운 감각으로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박상우의 『가시면류관 초상』은 그 내용과 주제의 낯선 충격과 함께 우리 문학의 소재를 확장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김성수(문학평론가)
박상우의 소설세계를 건축하는 문장들은 무겁고도 진지하다. 그 문장들은 오늘의 세상에서 즐겁고 편리한 쓰임새를 갖지 못한다. 그것들은 타성에 젖은 우리의 의식을 들쑤셔놓는 작업에 이바지한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술에 혼곤히 젖은 인물들이 토해내는 그 문장들은 우리를 어둠의 혼과 맞닥뜨리게 만든다. 『가시면류관 초상』에서 우리는 그러한 문장들이 가장 웅숭깊게 육화할 수 있는 삶의 주제와 세목이 무엇인지를 긴장한 마음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인류 최초의 살인을 모티프로 펼쳐지는 죄와 구원의 풍경은 절망의 예언서처럼 어둡게 채색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 어두움과 무거움이 진실을 바탕으로 삼고, 진실로써 구축되는 박상우 문학의 개성이며 가치라는 사실을 이 장편소설은 분명하게 밝혀준다. --이경호(문학평론가)
* 초판발행일 | 2003년 7월 25일
* 신국판 | 280쪽
* ISBN 89-8281-705-0 03810
인간의 근원적인 어둠과 외로움,
자기 파괴 충동의 잿빛 묵시록!
박상우의 『가시면류관 초상』은 그 내용과 주제의 낯선 충격과 함께 우리 문학의 소재를 확장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김성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