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S 노트
"수혈할 피가 모자라면 스태프들이 나란히 누워 피를 뽑는 건 예사였고, 밤낮없이 병원에서 살면서 환자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손쓸 틈도 없이 허무하게 떠나갔던 환자들이 눈에 밟혔다…… 그러고는 치료에 실패한 이유를 꼼꼼히 분석해서 메모해 놓고 가슴에 품었다. 후배들에게도‘산 환자는 기억하지 말고, 죽은 환자만을 기억하라. 그래서 절대 똑같은 원인으로 환자를 떠나보내는 일을 만들지 말라’고 가르쳤다."
누구를, 어디로 찾아가야 할까? 병마에 시달리고 절망의 낭떠러지 끝에 선 순간 의사는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요, 유일하게 붙들 ‘신’의 존재와도 같다. 그런데 ‘3시간 대기 3분 진료’라는 한국 병원 현장의 현실에서 죽음이 생의 지척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묻고 싶은 것을 묻지도 못하고 거둬야 한다. 의사의 말 한마디, 손짓 한번에도 흠칫 놀란다. 그렇게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EBS 메디컬 다큐멘터리 <명의>는 그런 지점에서 ‘의사’에 초점을 맞춘다.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18명의 ‘명의’의 그림자까지 따라간다. 그러면서 병마와 싸우는 사연에 집중하는 ‘스토리’ 코드의 다른 의학 프로그램과 차별화했다.
『명의_심장에 남는 사람』은 해당 질병에 대한 이해와 함께 커다란 하얀 건물, 삭막한 불 꺼진 병실 뒤켠의 이야기다. 환자만이 병마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를 위해 ‘신의 손’을 빌리고자 오매불망 고민하고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도록 365일 병원 근처에서 맴돌며 생활하고, 가족 외식을 병원 식당에서 한다. 의학계의 최신 정보는 모두 섭렵해도, ‘양문 냉장고’의 존재에 놀라거나 자판기 커피를 뽑는 방법조차 서투른 ‘의사’ 선생님들. 그들은 세계가 깜짝 놀란 수술기법을 창안하기도 했고, 아예 수술 기구들을 만들기도 했다. 불이 꺼질 줄 모르는 수술장, 새벽에 들이닥친 환자를 살리려 밤을 꼬박 지새우는 의사들. 하늘이 내려준 직업을 선택한 그들의 인생과 노력의 드라마를 만난다.
의사, 환자가 아닌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본 병원 이야기
너무나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사실, ‘명의’에 더 집착하게 됐습니다. 그들에게 보통의 인간이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환자들 때문에라도 그들은 그래야만 했습니다.
…
<명의>를 시청하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는 점은 과연 누가, 어떻게 ‘명의’를 뽑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의사라 불리는 ‘명의’는 2007년 2월과 9월, 두 번에 걸친 조사에 의해 선정되었습니다. 전문 조사기관은 전국의 전문의 1543명에게 전화를 걸거나 면접을 통해 70여 개의 질환 별로 ‘명의’를 추천 받았습니다.
‘여는 글’ 중에서
『명의』의 집필에 참여한 방송작가와 PD는 한 달 여 동안 ‘명의’ 곁에서 함께하며 제작 준비를 했다. 제작팀은 ‘명의’에 선정된 의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또 진료실에 앉아 외래진료 모습은 물론 수술장까지 따라 들어가 지켜봤다. 하루 24시간, 한 달 내내 명의와 함께하면서 그가 누구인지, 정말 ‘명의’라는 이름을 안길 수 있는지 면밀히 검토했다. 그러면서 얻은 인간적인 감상과 방송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이 책에 담았다. 명의와 환자가 나누는 대화를 듣기도 했고, 늦은 밤 불 켜진 연구실에서 명의의 생각을 직접 물으며, 그들의 의술은 물론 인간적인 면면을 살펴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총 17개 질병의 전문의를 명의로 선정한 만큼 각 질병마다 깊은 통찰력이 느껴지는 명의의 호쾌한 예방법과 질병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의학 정보를 풍부하게 실었다. 이 책은 건강을 염려하는 모든 현대인들, 그리고 자식을 낳아본,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자 예방에서 발병 후 만나야 할 명의까지 한 권에서 일러주는 종합 안내서이다.
● 명의, 심장에 남는 사람
인생의 갈림길은 선택의 여지없이 일순간에 모든 것을 뒤바꿔버리기도 한다.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외면할 수 있는 것도, 그 자리에서 가는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자신이 ‘인간’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오늘 아침의 수술장의 풍경은 너무 고통스럽다. 딸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도의의 너무 이른 등장에 숨을 멈춘다. 의사는 환자의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전했을까? 오랜 경험으로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안심시켜 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어두운 비상계단 저 뒤로 어머니의 비명 같은 울음이 들렸다. 저들의 기댈 곳 없는 등을 누가 보듬어 줄 수 있을까? 더이상 물러 설 곳 없이 내몰린 저 가족에게 누가 희망의 빛을 전해 줄 수 있을까? 불가항력적인 잔인한 존재의 공격. 그랬다. 그게 바로 ‘폐암’이었다.
본문_ ‘당신이 살아있는 오늘’ 중에서
“전공의 시절 은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아이들은 너희가 죽고도 50년은 더 살아야 한다. 절대 그걸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이에게 남은 긴 인생이 자신의 실수 때문에 틀어지면 안 된다는 부담감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신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이토록 타인의 삶에 깊이 오랫동안 개입할 수 있을까? 수술을 거듭할수록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다. “수술이란 게 항상 완벽하진 못하거든요. 성공률 99면 완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100명 중 1명은 실패한다는 건데 수술을 할수록 겁이 납니다. 내가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표준에 따라 최선을 다했지만, 혹시라도 이 아이가 결과가 1의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점점 더 두려워지는 것 같아요.”
본문_ ‘예고편 없는 인생의 구원 투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