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단편 「십오방 이야기」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창작집 『친구는 멀리 갔어도』를 펴내면서 문단에 충격을 던져주었던 작가 정도상. 그늘진 곳에서 시대의 부조리를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그가 새로운 형식의 연작소설집 『실상사』를 선보인다.
인터넷과 첨단 매체가 유행하는 이 시대에 이 땅의 삶에 대해 늘 고민하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조명하는 그의 작업은 이번 창작집에서도 일관된 신념을 견지하면서도 새롭다. 해설을 쓴 박수연은 이를 두고 ‘낯익은 새로움’이라 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정도상은 변화에 대한 내외적 요구를 실현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소여되었던 삶과 사유의 터전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리얼리즘 넘어 ‘리얼한 삶’으로-다양한 소재 형식실험 선보여
『실상사』는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 자락에 있는 실상사를 배경으로 한 「봄 실상사」 「여름 실상사」 「가을 실상사」 「겨울 실상사」 「내 마음의 실상사」 등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집이다.
‘문예전사’로 불리며, 소설 속에 사회변혁의 뜨거운 열망을 온전히 녹여내어 리얼리즘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었던 정도상은 신작 『실상사』에서 소재와 형식면에서 뚜렷한 변신을 보이고 있다. 타락한 벤처사업가나 불교적 구도의 세계 등 여러 가지 소재와 정신분석적 기법과 시간의 해체 등 다양한 형식을 선보이며, “리얼리즘을 버리고 다만 리얼한 삶을 그리고자 몸부림칠 것”이라는 자신의 선언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봄 실상사」는 젊은 시절의 이상과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환상적 기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통일운동을 하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힘겨워하던 주인공 ‘나’는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내려간 실상사에서 첫사랑 여인 ‘운서雲西’와 마주친다. 그녀는 주인공이 80년대 위장취업을 했다가 구속되어 있던 중, 그의 아이를 가졌다가 지우고 떠났다. 서로 상처만 주고받으며 종내는 이루지 못했던 사랑에 대한 회한으로 운서의 뒤를 좇지만, 주인공은 번번이 그녀를 놓친다. 그러던 중, 달빛 환한 밤 운서와 마주친 ‘나’는 자신을 아느냐고 묻지만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띠며 모른다고 대답하고 해탈교를 건너 사라진다. 그후 ‘나’는 그녀가 타고 왔던 반짝이던 자전거가 살만 앙상하게 남은, 버려진 자전거임을 발견한다.
「여름 실상사」에서는 ‘명품’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추구하다 영혼과 육신이 피폐해진 여대생이 실상사에서 상처를 치유받는 과정을 서울과 실상사에서 보낸 시간의 교차 배열을 통해 보여준다. 실상사 요사채에서 깨어난 국희는 마구 잘려나간 머리카락과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르며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본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생활을 하던 국희는 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낙태 수술을 하고 실상사로 들어왔다. 그녀는 욕망에 따라 휩쓸리던 도시 생활에서 받았던 상처를 실상사의 은은한 저녁 종소리와 귀농한 친구 정혜에게서 위로받는다.
「가을 실상사」는 「여름 실상사」와는 반대로 자본주의적 욕망의 도시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인물인 현우의 죽음을 다룬다. 갑작스레 회사를 그만둔 ‘나’는 고향전답을 팔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동생 현우를 불러올려 공장 감독을 시키지만, 현우는 끝내 도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만다. 그는 여러 번의 입원과 가출 끝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 비극은 타의에 의한 강요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더 비극적이다. ‘나’는 현우의 뼛가루를 고향집 마당에 묻고 상념에 젖는다. 이 상념은 근대적 발전의 이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돌아보는 행위이다.
「겨울 실상사」는 근대적 발전의 이념을 밑받침으로 성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의 분열된 자아상을 형상화한다. ‘너’의 부정을 조사해달라는 ‘너’의 아내의 부탁을 받고 ‘나’는 ‘너’의 일상을 추적한다. ‘너’는 권력과 언론과 결탁해 성공을 거두는 타락한 벤처사업가이다. ‘나’는 어린 여자와 불륜을 행하고, 가장 친한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는 청도 거절하는 ‘너’를 실상사까지 쫓아가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나’는 ‘너’의 행동을 낱낱이 관찰하는 인물인데, 결말에 이르러 ‘너’가 ‘나’였음이 밝혀진다.
「내 마음의 실상사」는 ‘실상사’ 연작을 총괄적으로 의미화하는 작품이다. ‘나’는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창작을 위해 실상사에 왔지만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 내가 택하는 마지막 방법은 고향을 향해 걸어가서 육체노동자인 친구 봉구를 만나 생동하는 삶을 목격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작가인 주인공이 방황하는 이유와 경로 그리고 자기 성찰의 계기와 ‘좆도 아닌 것’이라는 뼈아픈 자기 확인이 있다. 작품의 결말에 터져나오는 나의 울음은 사회운동가와 소설가로서 누리는 허명과 허위의식을 확인하는 근원적 자기고백이다. 정도상에게는 여전히 더 내려가 조우해야 할 저 밑의 삶이 있는 것이다.
정도상의 소설은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생동하는 삶에 대한 동경,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을 담고 있다. 달라진 소재와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은 언제나 이 땅의 ‘삶’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아 안에 존재하는 ‘다면성’에 방황하는 우리의 자화상
‘실상사’ 연작이 소중한 이유는 모든 작품의 결말이 자기 성찰적 귀환을 이룬다는 데 있다. 그 점차적 수행의 자세로 ‘진여실상’을 찾아가는 자기 탐구를 작가가 게을리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박수연(문학평론가)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에서 실상사를 찾아온 사람들, 그들은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사는 방식도 다르지만 ‘잃어버린 무엇’과 함께 질곡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자아 안에 존재하는 자기의 다면성에 방황하고 있었다.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무력한 몸짓,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사유에 갇혀 있는 인간들이 찾아가는 곳, 그곳에 바로 실상사가 있었다.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은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정도상의 소설집 『실상사』는 상처의 여러 가지 풍경이기도 했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인간들, 그들은 또한 실상사를 찾아 가쁜 숨을 고르며 잠시 고요에 잠기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실상사는 반성을 통한 성찰의 상징으로 읽힌다. 소설을 통해 실상사를 한번 더 돌아보게 해준 정도상에게 감사한다. -도법道法(전 실상사 주지, 지리산생명평화결사 순례단 단장)
나비도 모르고 살았던 그 시절 80년대, 정도상의 소설을 읽으면 내 넋이 불끈 쥐어지는 주먹의 느낌을 받았다. 소설 『누망』을 읽으면서 소주 두 병에 물들어 오랜만에 울어본 적이 있다. 여기 지리산 천왕봉 서쪽 기슭의 세속은 적멸 가까이 내 시린 가슴 갈비 사이에 추풍을 일으켜준다. 정도상의 이 행적과 소설집 『실상사』는 한국 소설의 오늘을 보는 한 성찰인가? -고은(시인)
* 초판발행 | 2004년 7월 15일
* 신국판 | 224쪽 | 값 8,000원
* ISBN 89-8281-843-X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김송은(031-955-8865 | 031-955-8862)
리얼리즘을 넘어 리얼한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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