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회장의 작은 쪽지에 집중된 뜨거운 관심
변화와 부침이 심힌 증권 금융 분야에서 창사 이래 8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적자를 내본 적이 없는 거대 금융회사의 회장. 주급 32.5달러의 말단사환에서 시작해서 연봉 1,800만 달러(약 173억 원)의 회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 세계적 금융회사인 베어스턴스의 (전) 회장 앨런 C. 그린버그가 메모의 주인공이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수시로 메모를 써서 자신의 경영 원칙이나 제안을 전하거나 회사의 사정을 알렸는데, 바로 이 메모에 월가를 비롯한 미국 재계가 매료되었던 것이다.
1978년 CEO를 맡아 회사의 성장을 주도했으며 1985년부터는 회장에 올라 회사를 미국 7위의 내실 있는 투자은행으로 키웠던 장본인이 직접 쓴 메모, 게다가 미국 재계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메모인 만큼, 거창한 경영 철학이나 화려한 경영 기법을 기대할지 모르겠지만, 이 메모들은 그러한 기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최고의 경영 기법은 상식과 기본
그린버그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전하는 경영 메모를 모은 책『회장님의 메모』(홍은주 역, 이콘출판)에는 거창하고 화려한 경영 기법은 단 한 줄도 담겨 있지 않다. 최고의 경영 기법은 상식과 기본이라고 단언하면서 근검절약, 고객 우선, 겸손과 절제, 정직 등 잔소리처럼 들릴 말들을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CEO에 올라 처음으로 전한 ‘자리를 비울 때는 어디 간다는 말을 꼭 남기라’는 메모부터 시작해서, “비용을 1달러 아끼면 순익이 1달러 늘어난다”는 점을 강조하며 ‘서류 클립을 아껴 써라’ ‘봉투를 재활용해라’ ‘고무 밴드는 끊어져도 다시 묶어서 쓸 수 있다’ 등 회장님이 말하기에는 쩨쩨하게 느껴지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잔소리로만 들리지 않는 것은 따뜻하고 재치 있는 유머로 포장한데다 그 스스로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유머 속에 담긴 자린고비 경영 철학 정도로 읽힐 수 있겠지만, 그린버그 회장의 메모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경영의 진수가 구석구석 숨어 있다. 상식과 기본이 최고의 경영 기법이라는 그린버그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능력 위주의 인재 경영
MBA 출신만을 대접하는 월가의 관행을 깨고 그린버그는 색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MBA 학위 때문에 그 사람을 홀대하는 일은 없겠지만, 진짜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람들은 PSD(poor, smart, a deep desire to be rich 가난하지만 똑똑하고 부자가 되고 싶은 강한 열망)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1981.5.5.)
유머 경영
그린버그의 메모가 결코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은 슬며시 웃음이 나오도록 하는 유머와 함께 그의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아마 모르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페더럴 익스프레스는 베어스턴스의 자회사가 아닙니다.”(1986.4.14.)라거나 “저에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팩시밀리 회사에 들어가 베어스턴스를 주 고객으로 하는 판매원이 되는 것입니다. 베어스턴스에서는 마치 팩시밀리가 공짜인 마냥 마구 주문을 해대고 있기 때문이지요.”(1989.6.9.)라며 과다한 택배비용과 팩시밀리 구입비용에 제동을 건다. 또 연락처를 남기지 않고 자리를 비우는 직원에게 무선추적장치가 달린 개목걸이를 채우겠다는 메모(1983.6.24.)로 경각심을 일깨우거나 시장전문가를 채용해달라는 직원들의 요구에 적임자를 찾았는데 바로 센트럴파크의 침팬지라며 월가의 전문가를 비꼬는(1995.1.27.) 등 유머와 재미를 담은 메모 속에서 기본을 강조한다.
윤리 경영
“베어스턴스 전 직원이 늑대가 왔다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만약 의심 가는 행동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에는 보고해준 분께 후한 상금이 돌아갈 것이고, 설사 사실무근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기꺼이 알려준 분께 경계심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힘껏 격려해드릴 것입니다. 명령 체계 따위는 다 잊어주십시오!”(1993.2.5.)라고 강조하며 금융사로서 내부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실제로 그린버그 회장은 비리를 고발하거나 실수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직원에게 바로 현금으로 보상해주는 방법으로 직원들의 윤리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그린버그 회장 본인은 존스홉킨스 의료센터, 뉴욕공립도서관 등을 비롯한 여러 자선단체와 사회단체의 주요 후원자나 기금설립자이며, 300명 이상 되는 회사의 관리자급 직원들에게 총 수입의 4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도록 요구하는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
역발상 경영
그린버그 회장은 역발상의 사고방식을 투자뿐 아니라 경영에도 접목했다. “최근 한 대형 증권사가 차익거래 활동을 줄이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베어스턴스는 그와 반대로 차익거래 부서에 대한 인적, 물적 지원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1987.2.5.) “다시 어려운 시기가 닥쳐와 회사마다 대량 해고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감원이 아닌 고용에 힘써야 한다고 중론을 모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수 인력들을 확보할 때입니다.”(1989.11.9.)
리더십
그린버그 회장은 그의 메모에서 리더십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의무는 직원들이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잘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직원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 역발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주지해줘야 합니다.”(1988.10.4.)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듯이, 현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부서들도 언젠가는 햇빛 찬란한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 역할은 그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서 사기가 떨어지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1988.12.20.) 이런 리더십의 모습은 그와 절친하다는 세계적 투자가 워렌 버핏의 리더십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이미 부를 거머쥔 유능한 사람들이 자기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버핏, 신화를 벗다』에서)
기본 - 변하지 않는 것
회사의 성장과 규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그린버그 회장은 변하지 않는 것을 강조한다. “회사는 많은 변화를 보였으나,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1. 1978년과 비교해서 경영진이 단 한 명도 늘지 않았습니다. 2. 비용 절감의 중요성을 여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3. 자만심과 거만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4. 베어스턴스 직원들의 복지에 대해 여전히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1993.4.12.)
워렌 버핏이 서문을 쓰고 톰 피터스가 추천한 책
『회장님의 메모』의 서문은 세계 최고의 투자가 워렌 버핏이 썼다. 검소한 생활 태도를 비롯해서 투자와 경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 리더십의 원칙, 개인적인 취미, 그리고 기부와 자선활동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이 비슷한 버핏과 그린버그 회장, 둘은 절친한 사이라고 한다. 버핏은 이 책의 서문에서 그린버그 회장은 모든 분야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며, 이 책은 유머로 풀어낸 최고의 경영 조언서라 평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톰 피터스는 그린버그 회장의 PSD에 관한 메모를 염두에 두면서, 자신에게 MBA 학위만 없었더라면 쉰셋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베어스턴스에 지원했을 것이라는 말로, 이 책에 담겨 있는 경영 원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적 투자가가 서문을 쓰고 세계적 컨설턴트가 추천한 『회장님의 메모』는 10년도 더 된 메모들(1978년에서 1995년까지의 메모)을 모아 엮었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시대에 뒤쳐지지 않고, 오히려 지금의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것이 바로 그린버그 회장이 입이 닳도록 강조하는 ‘상식과 기본’의 힘일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20여년 가까이 임직원과 원활하게 의사소통의 수단이 된 메모에도 주목할 점이 있다. 베어스턴스는 임직원이 회사의 지분(보통주)을 40 넘게 보유하고 있고, 월가의 금융회사 중에서 직원들의 애사심이 남다른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에는 그린버그 회장의 허물없고 따뜻한 의사소통 방식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전자우편이나 블로그 등 이제는 더 다양해진 의사소통의 수단을 이용한 감성 경영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더욱 의미 있는 한 권의 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