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 울고 싶어 그렇게 그 어디든 스며들고 싶어 오직 마지막 울음소리만 남아 내 인생의 전부를 다 바친 저 무한에 가 닿을 오오 짧은 한순간의 울음만으로 ―「하이웨이 드리밍」중에서이유도 모르는 채 주어진 삶을 ‘치러내야’ 할지라도 단 한순간, 무한에 가 닿을 짧은 울음을 위해 기꺼이 인생을 ‘전부’ 바치려 하는 시인의 자세에서는 감상주의나 허무주의가 짙게 묻어난다. 그러나 치열한 사색과 절제의 기율이 긴장과 균형을 부여해 독특한 탄력을 자아낸다. 김태형의 시에는 물과 불, 뜨거움과 차가움, 분출과 삭임, 부드러움과 단단함이 역동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 풍부하고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이루는 조화와 질서 속에서 그의 시가 갖는 심층적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고행을 견뎌 적멸에 이르는 히말라야시다 김태형의 시에는 히말라야시다 배롱나무 바오밥 나무와 같은 나무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그의 시에서 나무는 인고와 침묵의 표상이다. 첫번째 시집에서 “나는 히말라야시다 오래도록 열려 있을 뿌리 밑 방 거대한/몸뚱이와 함께 너무 멀리 밀려온 것 같은 늦은 저녁/늦은 길 위로 서 있다 한참이나 서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시다”(「히말라야시다에게 쓰다」, 『로큰롤 헤븐』)라고 하여 히말라야시다와 강한 동일시를 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이 나무에게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표제시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에서 히말라야시다는 “바늘같이 날카로운 한 점 그늘을 빨아들이는” 인고의 화신이다. “광포한 말들”을 품고 침묵하는 먹장구름이나 “바늘같이 날카로운 한 점 그늘”을 빨아들이는 고행으로 괴로움을 상쇄시키고 있는 히말라야시다는 높은 침묵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이들의 침묵은 폭발적인 위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유려하기까지” 한 침묵의 미학을 형성한다. 또한 나무는 결핍과 고난으로 생명력이 위축된 불안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목불」에 등장하는 “누렇게 말라죽은 나무 한 그루”는 뿌리가 들려 허공에 매달려 있다. “뿌리가 들려서도 남은 수액을 안으로 삭이”는 인고의 자세를 보여주는 이 나무는 가히 ‘목불’이라 불릴 만하다. “저 나무는 고요히/제 타오르는 불꽃을 안으로 삭이며 한껏 메말라 있었다”(「그게 배롱나무인 줄 몰랐다」)는 나무는 고난의 운명을 감내하며 소멸해가는 구도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시인은 나무에서 고행을 견디며 적멸에 이르는 삶의 방식을 발견한다.(이혜원, 해설 「차가운 불꽃」 참조)
되레 먹장구름도 어둠 속에서는 저를 버린 채 눅눅한 공기가 된다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은 문득 되돌아서던 나는 편서풍을 올려다보던 어느 높이쯤에서 다시 마주친다 간혹 수십만 볼트의 검은 선을 한데 묶어 일시에 광포한 말들을 터뜨려 끊어내면서 한순간 집어삼킨 저 말들의 지옥을 그러나 괴로움은 어느 누구의 그늘이었는지를 묻지 않는다 한낮 햇빛을 들여 바늘같이 날카로운 한 점 그늘을 빨아들이던 히말라야시다는 어느덧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긴 호흡은 차라리 들끓는 숨가쁨이었던 것 뭉싯뭉싯 저 무거운 청동 먹장구름떼 빗소리는 조금씩 귀밑에 고인 작은 소용돌이의 안쪽으로 사라진다 이 소란스러운 침묵은 유려하기까지 하다 누군가 구름이 떠받친 내 높은 편서풍의 뒤를 올려다본다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전문히말라야시다: 소나무과의 상록침엽교목. 높이 30∼50m. 원뿔 모양에 가지는 수평으로 퍼지고 작은 가지에 털이 있으며 아래로 처진다. 나무껍질은 흑갈색으로, 얇게 벗겨진다. 잎은 침엽으로 30개 정도 군생하며 길이는 2.5∼5㎝로 짙은 녹색이고, 단면은 삼각형이다. 세계 3대 공원수(公園樹)의 하나로 전 세계에 널리 분포한다.(『파스칼 백과사전』)
사막의 삶을 견디며 ‘차가운 불꽃’의 의지를 내장해온 시인은 메마른 뿌리까지 내려가 피워올린 속꽃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인다. 그는 변함없이 ‘길 위의 시인’으로서 불모의 삶을 묵묵히 견인하는 구도의 자세를 견지해갈 것이다. 그의 모든 시들을 견고하게 엮고 있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들은 시인이 앞으로 뻗어나갈 드넓고 아름다운 시의 영토를 보장한다. 이혜원(문학평론가) 이 내성의 시인을 밑도 끝도 없이 사로잡는 부재와 폐허에의 몽상, 그 파일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롯하게 담아낸다 해도 한순간도 넉넉했을 것 같지 않은 삶의 편린들. 그게 우리 생의 전부라면, 그도 어쩔 수 없이 우주의 한 모래인 지상에 시간 부려놓고 캄캄한 밤하늘 저편에서 아득하게 반짝이는 제 별을 오래 더듬겠다. 어쩌랴, 낯선, 낯익은 세상 그렇게라도 노래하며 지나가는 것이 시인의 숙명인 것을! 울음조차 비릿한 초경의 시편들 앞에서 나도 시린 외로움을 함께 깨문다. 김명인(시인) 김태형의 시는 물의 흔적에 민감하다. ‘바다를 잃어버린’ 염전이나 갯벌, 유령처럼 바닷가를 달리는 협궤열차 같은 물의 끝에서 대평원이나 히말라야, 지평선이나 심해를 꿈꾼다. 그러나 너무 먼 곳, 먼 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귀를 연다. ‘심해 어둠 속’에서 귀를 열어 사방을 밝히는 향유고래처럼, 그는 폐허의 안쪽, 마음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물에서 나온 그의 ‘푸른 문장’들이 상처에 닿는 소금처럼 쓰라리다. 이문재(시인)
호수는 가볍게 하늘 쪽으로 떠 있고
푸른 물살을 저 울음으로나 서로 비추어내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