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미술학원’에서 배우는 싱그러운 미술이야기
오랜 옛날부터 자연은 그림의 어머니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손으로 재현하고자 화가들은 오랜 세월 캔버스를 앞두고 자연을 그려왔다. 자연은 그림의 ‘원조’이자 현재의 미술 분야로 정착하기까지 묵묵히 지원을 아끼지 않은 ‘선생님’이다. 그렇다면 그림을 통해서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할 게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연상하며 그림에 감탄해야 옳다.
밭이랑, 나무, 얼굴, 동물, 길, 몸, 소나무, 들꽃, 노을, 강, 과일, 바다, 하늘, 사막, 숲, 빈 들녘, 한옥, 고물상, 곡식, 사찰, 골동품, 문화유산, 화가의 작업실, 신화, 교회와 성서, 노동, 재래시장, 마을, 놀이, 축제, 문학 등 이 책은 이들이 미술과 숨결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세상을 좇아간다.
여기에 초대된 작가들도 쟁쟁하다. 김홍도, 신윤복, 신사임당, 구본웅, 장욱진, 조각가 김복진, 운보 김기창, 김관호, 백남준, 최석운, 렘브란트, 밀레, 미켈란젤로, 샤갈, 마티스, 모네, 세잔, 반 고흐, 코로, 시슬리 등 국내외의 유명 작가들과 우리 곁에 있는 생존 작가들이다.
지은이는 오랜 동안 미술기자 생활을 하면서 벼리어온 예리한 안목으로,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미술과 만난다. 예를 들면, 황토색의 밭이랑을 보다가 토기의 빗살무늬를 떠올리고는 밭을 갈듯이 목판에 그림을 새기는 오윤, 김준권, 유연복, 등의 판화작품을 떠올린다. 그리고 밭이랑을 닮은 호랑이가 등장하는 단원 김홍도의 「맹호도」를 생각한다.
나무를 소재로 한 글에서는 김형식 화백의 나무 그림과 박수근의 나무를 연상한다. 여기서 지은이는 “밭이랑이 한 줄 한 줄의 단순한 선이 백미라면, 나무에서는 하나의 몸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가 쳐지는, 좀더 확장된 선 긋기”임을 읽어낸다.
또한 도심의 빌딩 숨에서 단순한 직선의 백미를, 들꽃에서는 신사임당의 조충도와 색채의 신비를, 각가지 과일에서는 정물화와 미술의 기본요소인 형태와 색을 찾아낸다. 그리고 바다에서는 모네와 시슬리의 바다 풍경을, 한옥에서는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빼어난 조형미를, 동네 고물상에서 백남준과 설치미술관을, 사찰에서 한국미술의 뿌리를, 공연무대에서는 탁월한 감각이 돋보이는 회화세계를, 재래시장에서 조선시대 서민들의 풍속화를, 아이들의 놀이에서 발견한 무한한 상상력과 조형세계의 유사성을 읽어낸다.
지은이의 시선은 한결같이 자연과 일상에서 미술을 찾아내고, 미술에서 자연과 일상의 안쪽에 깃든 삶의 표정을 읽어내는 데 모아져 있다. 그의 주된 관심은, 그러한 과정이 단순히 자연과 일상에서 미술을 배우는 학습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이 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이 ‘그림으로 세상을 사랑한 법’을 깨치는 데 있다. 지은이가 보기에 ‘세상’은 놀라운 ‘미술선생님’이지만, 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은 미술 보다는 ‘그림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법’이다.
아이에게 엄마는 가장 좋은 미술선생님!
이 책은 그림의 요소와 원리를 자연, 나아가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세상에서 찾아내어 미술과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을 지은이는 딸아이로 인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강압적인 초등학교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지은이의 아이가 학교를 거부하자, 아이와 함께 학교가 아닌 자연을 찾아 나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이를 다시 학교에 적응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든 설득하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저자는 강제력을 동원하기보다 자연에 아이를 맡겨놓는다. 그런데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다. 아이는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고 자연의 품에 안겨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고, 나아가 세상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은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강압하지도 않지만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순수한 아이의 눈에 비친 자연을 보며, 엄마인 지은이도 달라진다. 덩달아 자연을 새롭게 보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문제아’로 취급될 수도 있었던 아이에 의해, 엄마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할까.
지은이는 비로소 세상을 어린아이와 같은 눈으로 보고, 그 안에서 미술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세상의 안쪽을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본다.
자연과 세상 속에 숨어 있는 그림 찾기
이 책은 4부로 나눠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선과 면, 형식’으로 보이는 자연에 대해, 2부에서는 자연 속에서 빛나는 ‘빛깔’에 대해, 3부에서는 ‘삶의 흔적’이 조형예술이 미친 영향에 대해, 4부에서는 ‘인간의 내면’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먼저, 1부에서는 자연에서 미술을 구성하는 선.면.형식이 나왔음을 이야기한다. 쟁기가 지나간 밭이랑이 연출하는 모습과 한 몸통에서 여러 나뭇가지를 치는 나무의 생김에서 미술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선’의 원리를 읽어낸다. 또한 세상의 수많은 인간 중 한 사람도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없듯이, 그 얼굴의 구성에서 형태의 다양성을 발견한다. 동적인 움직임의 형태를 잘 볼 수 있는 동물원에서 동작 표현의 학습이 이뤄지고 있음을, 곧게 혹은 굽이굽이 난 길에서 원근법을, 도심의 빌딩 숲에서 직선의 아름다움 등을 이야기한다.
2부에서는 발길에 스쳐 지나면서도 그 빛깔을 발견하지 못하는 들꽃에서 마술 같은 색채를 발견하고, 타오를 듯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에서 붉은 빛의 다양성에 대해 감탄한다. 주변의 자연을 담아내어 매일매일 새로운 색으로 변하는 강과 정물화를 탄생시킨 과일에서도 아름답고 다양한 색채를 찾아낸다. 바다와 하늘.사막과 같은 대자연이 품은 거대한 빛깔에 대해, 그리고 커다랗지만 아주 작은 미생물까지 공존하는 숲에서 또다른 색을 본다.
3부에서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 남은 삶의 흔적에서도 미술의 일면을 찾는다. 우리 한옥이 연출하는 수려한 조형미며,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 중 설치미술이라는 장르를 동네 고물상에서 이해하고, 미술관 벽에 갇힌 미술이 아니라 삶 속에서 어우러지는 미술을 엄마의 손길에서 찾아낸다. 불교미술의 산지라 할 수 있는 사찰에서 한국미술의 뿌리를 찾고 문화유산이 미술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종합적이지만 또다른 전시장으로 볼 수 있는 공연 무대에서 미술과의 공통분모를 읽어낸다. 또한 화가의 작업실에서 삶과 예술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인류의 역사와 상상이 만들어낸 신화가 상상화의 발전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성서가 서양 그림에서 어떤 존재인지 말한다. 또한 미술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노동과 건강한 일상이 넘쳐나는 재래시장, 삶의 터전이 되는 마을이 그림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본다. 아울러 아이들의 놀이와 공통된 미술의 상상력에 대해, 그리고 여러 예술에 영향을 끼치는 문학과 미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들의 세상과 싱싱한 자연의 풍경들
각 부의 끝에 붙인 팁 ‘아이들의 갤러리’도 흥미롭다. 영감을 자극하는 자세히 관찰하기, 봉선화 같은 천연염료로 발견한 색채들, 아이와 함께 만드는 데서 생기는 손끝으로 전하는 사랑, 호기심 덩어리인 아이들이 꿈꾸는 세상 등, 사랑하는 딸아이가 세상 속에서 발견하고 미술로 풀어낸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지은이의 글 못지않게 이 책을 빛나게 하는 또다른 요소는 풍부한 현장사진이다.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여겨서, 오히려 주의 깊게 보지 못한 자연과 세상의 황홀한 풍광이 그림보다 생생하게 펼쳐진다. 자연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이 책은 세상 속에서 미술의 요소와 삶의 숨결을 찾아준다. 그러면서 이 세상이 온통 명화(名畵)의 전당임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우리의 생활 터전인 세상이 바로 화랑이고 미술관이라고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들판이며 하늘이며, 산이며 강, 길이며 시장, 집 등 우리 주변의 자연과 생활공간은 모든 예술작품의 근원이며, 모티브가 됩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좋은 화랑이나 미술관은 없는 셈이지요.”_「머리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