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문의 파격적이고 이단적인 글쓰기는 이미 한국문단의 소중한 개성으로 자리잡았다. "언술의 명확한 지시성과 사실적 이미지로부터 일탈하는 글쓰기 형식으로 죽음과 구원 등과 같은 인간 본연의 문제를 천착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제12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고, 중편소설 『꿈』은 2003년 동인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언제나 형식적인 기교나 실험적인 시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작가 정영문. 이 가을, 문학동네에서 선보이는 소설 『달에 홀린 광대』는 『파라21』 창간호부터 연작 장편으로 연재된 것으로, 「달에 홀린 광대」 「산책」 「숲에서 길을 잃다」 「양떼 목장」 「배추벌레」 「횡설수설」이 실려 있다. 모두 작가 특유의 의식의 휴지부가 희박한 글쓰기의 선상에 있는 작품들이다.
「달에 홀린 광대」는 나와 아들의 엇나가는 관계를 대화를 통해 보여주면서 연작의 서두를 연다. 나는 이혼한 상태, 늙고 병든 전처는 양로원에 있고 "뒤늦게 머리가 트여" "잘나가는 토목기사"가 된 큰아들과 "몇 달째 집을 비운 후 소식이 없는" 막내아들이 있다. 나는 큰아들에게 떠밀려 아버지의 산소를 찾는다. 아들녀석의 행동이 못마땅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믿지 못하는 "의심 많은 늙은이"인 나는 아들에게 냉소와 부정으로 일관한다(심술궂고 변덕스러운 인물, 정영문 소설의 주인공이 가진 특징이다). 소통에 소용되지 못하고 흩어지고 마는, 언어유희에 가까운 뻔뻔스럽고 불쾌한 나와 아들과의 대화는 일탈적 가족관계를 극명히 드러내준다. 또한 아버지라는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인상과 반감, 소통 불능, 단절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성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나는 갑자기 차를 세우게 하고 혼자서 내리고, 이유를 알아야겠다며 따라 내린 아들녀석의 뒤통수를 갈겨 쫓아 보낸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여전히 나는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나 자신이,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게 주어지지 않은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나 자신이 달에 홀린 광대처럼 느껴졌다."
「산책」에서 나는 유일한 친구이자 오랜 친구 B의 집을 향해 가고 있다. 산책길에, 고무호스를 고양이라고 우기는 어린 소녀를 만나고, 바다에 면한 언덕 위 자전거 안장에 걸터앉아 있는 노인을 본다. 젊은 시절 강을 헤엄쳐간 일, B와 함께 유람선을 탄 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본 일 등 무수한 기억과 상념이 떠오른다. 그리고 B의 집에서 "오랜 친구들이 만나 나누기에 마땅한 얘기들로 느껴"지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실상은 "어디로 나아갈지 알 수 없는 이야기" "실제로 있었던 일은 하나도 얘기하지 않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이야기. "뭘 좀 먹겠어? / 모르겠어. 먹을 수는 있어. / 먹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 먹겠다고는 하지 않았어. 먹을 수는 있다고 말했지" 혹은 "당신 언니가 한 어떤 말들은 잊지 않고 있어. / 잊을 수 없는 어떤 말들을 했으니까. 어떤 말들을? / 어떤 말들을" 같은 부분은 마치 "어떤 연극 무대의 배우들"의 대사 같다.
「숲에서 길을 잃다」에서 나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막내놈과 함께 그의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동생 집으로 간다. 술을 마시면서 아버지를 생각한다. "누구보다도 삶과 자신과 가족을 사랑했다고는 할 수 없는 삶을 살다 간" "누구보다도 괴팍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아버지를. 그리고 괜히 심술이 난 나는 술에 취해 동생과 대판 싸움을 벌이고 급기야 제사상 위에 토하고 만다(나가 스스로 내뱉는 말처럼 정말 압권이다, 압권). 이튿날 혼자 근처 숲으로 산책을 갔다가 길을 잃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숲은 길을 잃기에 좋은 곳이지, 숲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더이상 길이 아닌 곳에서 길을 잃었다고 할 수 있을까, 길을 찾게 되거나 못 찾게 되겠지 등등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양떼 목장」은 친구의 양떼 목장에서 안내인 일을 하면서 지내는 나의 이야기, 「배추벌레」는 낯선 일행과 함께 배추밭에서 일을 하는 나의 이야기이다. 공간도, 인물도 현실감이 있지만, 동시에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원하는 것이 있기나 한지도 알 수 없는 나는 기꺼이 무의미한 것들에 몰두하고, "실천보다는 실천에 옮기지 않는, 끝내는 옮겨지지 않는 생각"을 중요하게 여긴다. 「배추벌레」의 나 또한 혼란스러운 생각, 생각의 혼란스러움에 빠져 있다.
연작을 끝맺는 작품 「횡설수설」은 "어디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나의 얘기, 나의 얘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얘기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편리하게도 어디에서 끝내도 좋은 얘기이다. 거기에 나의 얘기의, 내가 나의 얘기라고 생각하는 얘기의, 그리고 지금부터 나의 얘기로 만들 생각인 얘기의 특징이 있다"로 시작한다. 나 혹은 그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을 독백으로 들려준다. 바다와 숲과 양떼 목장이 사유의 표면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사냥개처럼 보이는 개와 죽은 생선을 고양이라고 부르는 소녀와 펠리컨이 개연성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생각은 끝도 없이 그렇게 생각은 생각을 낳고, 생각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생각은 인식과는 전혀 무관하다. "나는 나의 상태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였다." 무력하게 누워서 생각만 하는 나 혹은 그는, 문학평론가 박철화에 따르면, 근대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의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코기토 명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방인"으로, 이로써 우리 존재와 세계를 뿌리째 뒤흔들어놓고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 작품의 미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정영문은 "이 삶을 뭐라 단정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문장 안에서조차 앞의 말을 부정하는 말이 따라올 정도로 부유하고 이로써 의미가 지워지는 글쓰기 방식을 고수한다. 또한 살아 있는 존재에게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므로, 집요하게 죽음이라는 주제를 탐색한다. 그리하여 『더없이 어렴풋한 일요일』에서는,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앞당겨 누리는 좀비(김형중)를, 『꿈』에서는 이런 것 같기도 하고 저런 것 같기도 한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21세기 이방인(김화영, 2003년 동인문학상 제6차 심사독회)을 탄생시켰다.
이제는, 달에 홀린 광대이다. 그의 낯선 시선을 통해서, 태양 아래 명확했던 모든 것, 존재와 세계는 달빛에 휩싸여 모호해진다. 불안과 권태와 냉소로써 다시 한번 이 삶을 뭐라 단정하는 것은 모순임을 알리는 정영문의 달에 홀린 광대는, 관객들이 무엇이 나올지 늘 이미 알고 있는 관습적 청취 지침을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하는 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광대〉와 닮아 있다.
어디에서 시작해도, 어디에서 끝내도 좋을, 광대의 무(無)를 향한 독백!
정영문의 『달에 홀린 광대』는 우리에게 연금술의 황홀경을 경험하게 하는 소설이다. 『달에 홀린 광대』는 다만, 쉴새없이, 중얼거린다. 그렇게 중얼거릴 뿐인데, 이 중얼거림을 듣고 나면, 어느 한순간에 현존재들이 떠받드는 진리는 비본래적인 가치로 뒤바뀌고, 현존재들의 진리를 향한 실천은 소음과 소란으로 전도된다. 그리고 대신 달에 홀린 광대와 같은 현존재로부터 버려진 것들과 침묵을 강요당했던 것들이 찰나적으로 사유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그 빛과 그 빛이 빚어내는 경이는 곧 사라지고 그 경이가 떠난 자리는 불안과 권태와 냉소가 채운다. 『달에 홀린 광대』는 이처럼 아무런 화학적 변화도 없이 빛이 어둠으로, 어둠이 빛으로 전화하는 마법으로 가득 찬 소설이거니와, 이로써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해체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류보선(문학평론가, 군산대 교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근대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의 가장 밑바탕을 이룬다. 그것은 너무도 명확하여 마치 맑은 날 정오의 햇살과도 같다. 그런데 정영문은 그것을 뒤집어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이란, 요약하자면 생각에 대한 생각이다. 아니 그것은 계속되는 물음, 즉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또 생각……하는 방식으로 무한 증식한다. 그럼으로써 근대인으로서의 우리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태양 아래 서 있는 명확한 존재 대신에 달에 홀린 모호한 이방인으로서의 우리가 여기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그의 시선 앞에서 우리의 삶과 세계는 모두 의문투성이가 된다. 바로 이 질문의 힘이 이 작품의 미적 가치를 이룬다. 박철화(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수)
* 2004년 9월 10일 초판 발행
* ISBN 89-8281-860-X 03810
* 신국판/240쪽/값 8,5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황문정(031-955-8865, 8863)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갔고, 계절이 바뀌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원하는 무엇이 있기나 한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의미한 것들뿐이었고, 그래서 나는 무의미한 것들에 기꺼이 몰두했다.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