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연인은 로맨틱하지만, 화가의 아내는 위대하다!
렘브란트, 밀레, 마네, 르누아르, 샤갈, 달리…… 열아홉 명의 거장을 탄생시킨 숨은 공로자, 화가의 아내.
화가의 ‘연인’과 ‘아내’ 사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섬세하고도 즉흥적인 감성을 지닌 사람……사람들은 대개 화가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 화가와 사랑에 빠지고, 그림의 모델이 된 여인들이 있다. 화사한 빛깔로 세상을 채색하듯이, 화가와 나누는 사랑은 ‘그림처럼’ 아주 로맨틱하다. 화가들의 러브스토리가 오랫동안 에세이와 소설의 소재로 사랑받아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화가와 함께 생활하는 여인의 삶은 그리 달콤하지 않다. ‘화가의 아내’들은 음지식물처럼 화가의 그늘에 살면서 말없이 화가를 뒷바라지하는 것이다. 화가들도 일반인과 똑같이 가정을 꾸리고, 가장이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구나 화가들은 일반인보다 감정의 기복이 크고 신경이 예민한 편이며, 사회 원칙과 충돌하는 경우가 잦다. 그래서 흔히 예술가 기질로는 사회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이런 화가와 가정을 꾸리고 동고동락해야 하는 운명의 여인이 바로 ‘화가의 아내’인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화가들의 그릇된 행각에 대해, 그들이 ‘예술가’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주곤 한다. 일탈된 행동을 일삼는 예술가 기질이나 결혼 후까지 계속되는 연애행각을 일반인들은 오히려 아름답게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남편인 화가의 행동이,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아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혹시 주변의 위로조차 받을 수 없는 고독으로 그들을 내몰진 않았을까?
베일에 가린 화가의 아내들
『화가의 아내』는 로맨틱한 화가의 연인에 관한 책이 아니다. 화가의 아내도 물론, 로맨틱한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지만, 긴 세월을 화가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편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뮤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생활인으로 곁에서 화가를 내조한 일등공신이 바로 ‘화가의 아내’인 것이다.
이 책에는 17세기의 렘브란트부터 밀레, 로세티, 마네, 세잔, 르동, 모네, 르누아르, 고갱, 보나르, 마티스, 피카소, 시게루, 모딜리아니, 리베라, 샤갈, 류세이, 달리, 그리고 생존 작가인 와이어스에 이르기까지 열아홉 명의 화가와 아내들의 삶이 담겨 있다.
지은이는 “화가를 평가하는 데에도 화가의 아내는 잊힌 존재였다”라고 하면서 화가의 그림자로 살아가고, 간혹 출생년도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아내들의 삶을 추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책에 실린 ‘화가의 아내를 그린 초상화’(대표작) 열아홉 점 중, 건강상의 이유로 볼 수 없었던 리베라의 벽화를 제외하고 모두 원화를 찾아 직접 보고 올 정도로, 지은이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방대한 자료를 찾아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아내들의 삶을 면밀히 그려나간다.
미술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화가의 아내’라는 소재에 열정을 쏟으면서, 지은이는 어느 책에서도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나간다. 예컨대 고갱이 단지 예술을 향한 송고한 열정만으로 증권거래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는 사실, 달리가 동성애자이기도 했다는 점을 비롯해 320쪽을 메우고 있는 행간마다 새로운 정보가 빛난다.
또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것은, 화가의 아내들이 열아홉 명의 거장들의 작품세계에 끼친 영향을 파헤친 점이다. 르누아르 특유의 포동포동한 여성상이 그의 아내인 알린의 체형에서 비롯된 점이나, 보나르를 대표하는 누드화가 자주 씻는 버릇을 가진 아내 마르트를 향한 사랑에서 탄생한 점, 모네의 두번째 아내 알리스가 모델을 집 안에 들여놓지 못하게 엄포를 놓아, 모네가 후기에는 주로 풍경을 그리게 되었다는 점 등이 그렇다.
위대한 예술가를 키운 아내들의 삶과 내조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면밀한 조사를 통해 화가의 화려한 명성 뒤에 은폐돼 있던
아내들의 삶을 세세하게 밝혀냈다는 점이다. 반려자인 아내의 삶의 궤적을
하나하나 추적, 성장 환경부터 결혼생활, 죽음에 이르기까지 종합적으로
분석, 소개하면서, 거장으로 우뚝 선 화가들을 위해 아내들이 어떠한
공헌을 했는지 잘 보여준다.
예컨대, 아리따운 소녀 같은 밀레의 첫 아내와 달리, 초상화를 별로 남기지 않은
두번째 아내 카트린은 빈농 출신이었다. 그런 아내의 영향을 받아, 밀레가 파리
생활을 접을 당시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농촌 지역에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 실린 카트린의 초상화가, 밀레가 ‘농민 화가’로
접어드는 첫걸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로세티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모델과 화가가 육체관계를 갖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로세티의 아내가 된 엘리자베스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 성관계를 기피했는데, 이런 아내로 인해 문란한
생활을 하던 로세티가 그녀를 모델로 명작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를 탄생시켰을 것이라고 한다.
로세티의 아내와 달리, 남편과 모델의 관계에 능숙하게 대처한
아내도 있다. 마네의 아내 수잔은 침착하고 대범했으며, 낙천적인
기질을 지녔다. 마네와 모델 사이의 은밀한 관계를 눈치 채면 아틀리에 쪽으로 가는 일을 피했으며, 때로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델에게 가서 천연덕스럽게 수다를 떨었다. 마네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수잔의 이런 기질 덕분에 이 부부는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르동의 아내 카미유는 꽃 그림을 그리는 남편을 위해 언제나 야생화를 꺾어다 놓고, 여름 별장의 정원에 씨를 뿌리고, 꽃으로 가득 찬 풍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집안일을 해나간 르누아르의 아내 알린은 남편이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려 목숨까지 위험해지자, 몸을 움직여야 병세가 호전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집 안에 당구대를 들여 남편이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유도했다.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와 미국 등지로 망명생활을 했던 샤갈에게 언제나 현명한 판단으로 조언해주고, 러시아어로 쓴 남편의 책 『나의 인생』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아내는 벨라였다. 이 아내들은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적극적인 내조로 위대한 예술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넘치는 예술가 기질로 초현실주의의 대표작가가 된 살바도르 달리가 아내 갈라를 만난 후, 어느 누구보다 순애보 같은 사랑을 했던 점이나, 임신 아홉 달째였던 모딜리아니의 아내 잔이 스스로 자살을 선택해 남편을 따라갔던 이야기, 리베로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한 프리다 칼로, 피카소의 엄청난 엽색행각에 끊임없이 질투하고 간섭하면서도 끝끝내 아내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올가, 또 남편이 말년에 새로운 연인을 선택했을 때, 그의 곁을 떠나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 온몸을 던진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 등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화가는 예술을 낳았지만, 아내는 그 화가를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