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담과 전설에서 문학으로, 그리고 신화로 거듭난 네 인물
영문학자인 이언 와트는 서양 근대 문학사에 개인주의의 전통이 확립되는 과정을 네 인물을 통해 추적했다. 파우스트와 돈 키호테, 돈 후안,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허구적 인물로 치부할 수도 없는, 일종의 중간 영역에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민담이나 전설로 전해져오다가 문자로 정착된 인물이거나(파우스트, 돈 후안), 처음 발표되었을 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후 수많은 판본과 아류작의 주인공이 된 인물들(돈 키호테, 크루소)이다.
최초의 기원이 어찌되었든 간에 이들은 서구 근대화의 시기인 르네상스, 반종교개혁기와 낭만주의,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일종의 ‘신화’로 자리잡는다. 물론 이들의 ‘신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리스나 로마, 북유럽의 신화와는 다르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말했듯, 고대인들에게 신화가 중심 역할을 한 반면, 이들의 시대에는 그런 중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 네 인물들은 각자 태어나고 사랑받았던 시기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낭만주의나 계몽주의, 마르크시즘과 탈식민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신화’로 탈바꿈한다. 이언 와트는 이러한 네 인물의 변화와 신화화 과정을 그 기원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통사적으로 추적함으로써, 근대 서구문학에 개인주의가 자리잡고 인정을 받고, 마침내는 문학의 주인공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까지 여겨지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펼쳐 보인다.
세 가지 르네상스 신화와 청교도 윤리
크루소보다 앞선 세 인물의 탄생기는 르네상스와 그 뒤를 이은 반종교개혁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가 개인에게 부여한 절대적 자유는 곧 반종교개혁의 쓰디쓴 실망으로 이어진다. 파우스트에 나타난 근대적 모티프인 ‘계약’과 돈 후안에 나타난 종교적 모티프인 ‘징벌’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들을 투영하고 있다. 돈 키호테 역시 르네상스가 꽃피운 기사도 로만스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인물이지만, 작품 전반에는 반종교개혁기에 근대인들이 맛본 실망과 환멸이 흐르고 있다.
수많은 판본이 존재하는 『파우스트』는 중세의 떠돌이 마법사인 게오르크 파우스트(파우스투스)에게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중세 대학에서 돌팔이 마법사라 불린 파우스트는 트리트하임과 같은 인문주의자나 루터 같은 종교개혁가 양쪽에게 지독한 경멸을 받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다음 세기에 영국으로 건너간 뒤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투스 박사의 비극적 생과 사』에서 서사시적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와트는 이를 재주가 많고 고등교육을 받았으나 그에 걸맞은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했던 말로와 같은 당시의 ‘대학 출신 재사’들의 비감이 투영된 결과라 보았다. 돈 키호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르네상스의 궁정 이데올로기가 더이상 통용되지 않은 시대의 인물인 말로와 세르반테스는 사회 상황에 대한 환멸을 공유하고 있었고, 이를 자신들이 그리는 인물에 투영했다. 티르소의 돈 후안은 드높은 르네상스의 이상주의를 조롱하고 흠집 내었으며, 자유의지를 믿었으나 결과적으로 그 선택에 희생되는 인물이다. 이들 작가들과 그들의 인물이 처한 소외는 이들에게 지극히 근대적인 의식, 즉 ‘개인주의’를 부여한다. 크루소의‘경제적 개인주의’는 이들과 맥락을 조금 달리한다. 시대적으로도 가장 나중에 태어난 크루소는 영국 청교도 윤리와 중상주의의 산물이다. 홀로 무인도에 남겨진 채로 섬을‘경영’하고 그것에서 만족을 얻는 크루소는 계몽주의와 마르크시즘을 주창한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게 된다.
개인주의의 본격화, 낭만적 신격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시대부터 네 인물의 신화화는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크루소는 개인주의의 기초철학을 정의한 루소에게 사랑받아 계몽주의 시대 최고의 스타가 되기도 하고, 중상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마르크스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마르크스 및 당대의 정치경제학자들은 크루소가 처한 상황에서 원초적 자본주의를 보았고, 크루소 신화를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한편 괴테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파우스트와 모차르트, 골도니 등의 음악가와 몰리에르, 바이런 등에 의해 재해석된 돈 후안은 원형적 시기의 어리숙한 때를 벗고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거듭났다. 또한 돈 키호테는 영국과 독일, 프랑스와 러시아의 낭만주의자들로부터 사회적 평등과 이상을 위해 싸우는 순수하고 참된 투사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의 배경에는 개인주의의 본격적인 제도화가 있었다고 와트는 말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결과로 부각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우선성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 등을 통해 더욱 널리 전도되었고, 일반 대중에게도 서서히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다.
문학과 역사가 만나는 행복한 책읽기
마지막으로 와트는 20세기에 바라보는 네 인물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의 개인주의를 진단한다. 토마스 만의 『파우스투스 박사』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 그레이엄 그린의 『몬시뇨르 키호테』, 그리고 최근 노벨상을 수상한 쿳시의 『포』에 이르기까지, 20세기에 와서도 네 인물의 변신은 그치지 않았으며, 전대의 신화를 해체하는 탈신화와 재해석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의 모방작들은 여전히 원작을 존중하고 동경한다. 이제 네 신화는 지난 시대만큼 독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만, 자아의 요구와 그것이 속한 사회의 요구 사이에 벌어지는 다양하고 영원한 투쟁의 역사를 살펴볼 때 매번 참조할 수밖에 없는 원전으로 남았다.
서구 문학사에 가장 뚜렷한 흔적을 남긴 네 인물을 통사적 씨줄과 날줄에 걸어두고 꼼꼼히 살핀 와트의 작업은 무려 4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는 말년에 병상에서도 책의 집필에 매달렸으며, 책이 거의 완성단계이던 1994년,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동료들에게 책의 편집을 맡겨야 했다. ‘작년의 새둥지에 올해는 새가 없네’라는 돈 키호테의 쓸쓸한 인용은 저자 자신의 심리를 대변하는 듯하여 큰 울림을 전해준다. 그러나 방대한 사료 연구와 깊이 있는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결코 ‘전문가용’으로만 씌어진 책이 아니다. 실존 인물과 허구가 만나는 방식에 대한 저자의 위트 넘치는 고찰과 문학적, 역사적 상상력의 유쾌한 결합은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까지 행복한 책읽기로 이끌 것이다.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네 가지 위대한 신화가 근대 문명에서 어떻게 실재성을 획득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역사, 문화, 윤리, 미학적 비평서이다. 잔재주가 아닌 진정한 박식함, 따뜻함과 위트를 겸비한 분석과 역사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저서. 모든 이들이 읽어야 할 책.
―에드워드 사이드
‘사회’에 대한 ‘개인’들의 피할 수 없는 불평과 필요에서 비롯된 질문, 즉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깊이 파헤치고 드러낸 역작.
―웨인 C. 부스, 『보스턴 북 리뷰』
전작 『소설의 기원』처럼 독창적인 책. 저자의 성숙과 검증된 지성, 교양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저작.
―프랭크 커모드(영문학자)
▶ 지은이 이언 와트Ian Pierre Watt(1917~1999) 영문학자.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2년 2차 대전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었고, 1945년까지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 묘사된 일본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강제노역을 하기도 했다. 194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UCLA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했으며, 1952년 UC 버클리의 영문과 조교수로 임명된 후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을 거쳐 1964년부터 스탠포드 대학의 영문과 교수로 평생 재직했다. 1959년과 1972년에 구겐하임 기금을 받았고, 1972년 전미(美)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에 펴낸 『소설의 발생 : 디포, 리처드슨, 필딩 연구』는 18세기 영국 사회 변화의 틀 속에서 소설의 부흥을 분석한 책으로, 영문학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19세기의 콘래드』(1979)와 사후에 출간된 『근대 개인주의 신화』 역시 영
"개인주의"는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생겨났다. 개인주의는 성숙하고 냉정한 감정으로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인간들의 무리로부터 떼어놓고 가족과 친구들에게서도 떨어져나오게 만든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