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장 가는 길에는 그림처럼 행복하게 사는 법이 있습니다!”
뉴욕에서 미술과 열애 중인 젊은 그림감정사,
그녀가 들려주는 소더비와 크리스티 미술 경매장 ‘인사이드 스토리’
그림 한 점 때문에 잘 나가는 인생을 바꾼 화가처럼, 지은이는 영화 속에 등장한 한 켤레의 빨간 루비구두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지은이는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보고, 주인공 도로시가 신었던 빨간 루비구두에 매혹된다. 갖고 싶을 만큼 탐이 났다. 하지만 영화 ‘속’의 구두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다시 그 구두에 관련된 소식을 접한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그 빨간 루비구두가 출품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추억에 가격이 붙어서 판매되다니. 놀라웠다.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뉴욕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빨간 구두 때문에 뉴욕으로 가출하다!
그렇게 뉴욕 땅을 밟은 지 3년이 흘렀다. 국내에서 이미 경매업에 종사한 경력을 갖고 있었음에도 지은이는 세계적인 경매회사에서 기본기부터 다시 시작한다. 경매회사에서 단 하루만 문지기라도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만큼, 허드렛일마저 즐거웠다. 도제식 배움과 산 체험은 피와 살이 되었다. 그러면서 비로소 경매업에 제대로 눈을 뜬다. 그동안 경매업을 ‘미술품을 사고파는 업’으로만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서비스업’이 바로 경매업이었다. 역시 뉴욕은 ‘큰 물’이었다. 마음에 둥근 해가 떴다. 그는 미래의 더 ‘큰 물’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
“베테랑 웨이트리스 같은 그림감정사가 되고 싶다. 훌륭한 그림감정사는 노련한 웨이트리스가 되는 것과 별다를 게 없다. 감정사는 요리사도, 식탁에 앉아 있는 손님도 아니다. 요리사는 화가의 역할이고, 음식은 그림이고, 손님은 고객이다. 그러나 좋은 웨이트리스가 되려면 음식에 대해서 꿰뚫는 것은 기본이고 식당의 역사, 식당 주변의 가볼 만한 곳, 손님의 취향, 식사의 과정과 서비스까지 흐르는 물처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책은 뉴욕의 세계적인 경매회사 소더비와 크리스티에서 겪은 견습시절의 체험과 일상을 모은, 한 햇병아리 ‘그림감정사’의 일 년치 일기장이다. 지은이가 “가장 막막한 시절”에 썼다는 이 일기에는, 경매에 관한 ‘알짜’ 정보와 꼬였던 시간의 상처가 마마딱지처럼 남아 있다. 그런 만큼 “이 책은 고난 끝에 일어선 사람들이 펴내는 성공담류가 아니다.” 오히려
“뭔가 잘 풀리지 않던 시간들, 잘 나가지 않던 시간들”을 통해 뉴욕 미술시장에서 걸음마를 시작한 한 그림감정사의 ‘행복한’ 땀방울을 보여준다. 백만장자인 강철왕 카네기는 자동차 견습공 시절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 책도 그와 마찬가지로 견습시절을 행복하게 추억하는 지은이의 호기심과 열정을 따라간다. 장차 “베테랑 웨이트리스 같은 그림감정사가 되고” 싶은 지은이는 보온병처럼 따뜻한 사람이다. 그의 “큰 잠재력은 어떤 환경에 처해도 주변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천부적 재능이다”(웬델 가렛/소더비의 시니어 스페셜리스트, 월간 『앤티크』 발행인). 그는 상처를 드러낼 때도, 결코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그 따뜻함은 세상을 보는 지은이 마음의 온도와 일란성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이 책은 일종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정민씨, 사람들은 왜 무엇인가를 모을까. 수집가는 왜 시대마다 존재했을까? 모은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일까?”한 지인이 무심히 던진 이 질문을 화두삼아 지은이는 나름의 해답을 모색한다. 그런 가운데 뉴욕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좌충우돌하며, 세계적인 경매장의 미술품 거래과정에 참여하는 등 한 사람의 그림감정사로 성장하는 과정이 경쾌한 템포로 펼쳐진다. 가령 지은이는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예술품을 최고의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서, 그림을 모으고 또 그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현대미술품 단골수집가 스톤 부부」)는 현대미술 단골수집가 부부에게서 컬렉션의 참모습을 발견한다. 지금 그는 뉴욕에서 세 가지 일을 하고 있다.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 미술품 감정, 비영리기관이나 재단의 미술품을 수집.유지하기 위한 컬렉션 매니저가 그것이다. 이런 배역은 미술품과 사람(컬렉터), 사람과 사람을 맺어주는 ‘미술품 중매쟁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책은, 지은이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과 일상의 동선(動線)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뉴욕 생활과 놀라운 경매의 세계, 미술품 수집의 묘미 등을 맛깔스럽게 소개한다.
소더비와 크리스티에서 미술을 발견하다!
―생생한 체험과 현장 사진으로 본 세계미술품 경매의 안쪽 품경들
미술경매장에 관한 흥미진진한 ‘인사이드 스토리’. 이 책의 특징을 대강 꼽아보자.
첫째, 왜 하필이면 일기형식일까? 일기는 개인이 겪은 일상과 내면의 기록이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저장된 은밀한 ‘마음의 곳간’이다. 이런 곳간을 공개하는 일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타인과 나누겠다는 적극적인 의사표현인 것이다. 지은이의 자잘한 일상사와 수억 원이 거래되는 미술품 경매 현장이 생생하게 부각되는 가운데, 독자는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와 더불어 낯선 미술품 경매 정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둘째, ‘세계적인 미술품이 움직이는’ 뉴욕미술시장의 ‘안쪽’을 보여준다.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매장의 내부와 관계자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수많은 작품이 산적해 있는 경매장의 창고를 본 소감, 팝아티스트 로젠퀴스트나 대지미술가 크리스토처럼 현대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거장들과의 만남, 소더비에서 세계 최고가의 작품 「파이프를 든 소년」(파카소)이 탄생하던 순간들,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컬렉터들의 집 방문, 자신의 집에 미술관을 짓는 사람들과의 만남,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의 ‘갤러리 같은 화장실’, 예술품 수집가인 영화배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일화 등은 내부 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뉴욕미술시장의 진풍경들이다. 이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현장 사진으로 실감을 더한다. 사진은 본문을 보충하고 확장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로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의 진가는 이런 데서 빛을 발한다.
셋째, 지은이의 일상사다. 아주 개인적인 생활이나 취향이 드러난 일기들에서 독자는 지은이의 따뜻한 감성과 미술품을 향한 애정지수를 확인할 수 있다. 첫 출근의 설렘, 첼리스트 요요마와의 세 번의 만남, 안경 이야기, 마라톤 대회 참가, 동생을 향한 애정, 뉴욕의 포장마차, 이사, 나무쟁반에 그림 그리기, 알래스카 여행, 팬케이크와 어린 시절의 추억 등은 지은이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또 이런 이야기들은 경매장 이야기와 어우러져 책의 질감을 풍성하게 해준다. 독자는 다양한 체험으로 세계관과 미적 감수성을 키워가는 지은이의 성장 과정에 동참하며 잔잔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넷째, 짝수 달과 홀수 달을 나눠, 끝부분에 따로 쉬어가는 페이지를 구성했다. 짝수 달에는 뉴요커들만 알고 있는 뉴욕의 명소들(「앗, 여기가 바로 거기!」)과 현대미술의 진경을 볼 수 있는 미술관련 행사를 소개(「뉴욕의 OO, 뭐 특별한 거 없을까?」)한다. 뉴욕에서 알고 있어야 할 알짜배기 미술정보들만 가려 모았다.
그리고 홀수 달 끝에는 책에 무게를 주는 깊이 있는 글들을 실었다. 지은이의 전문성이 십분 발휘된 각 글에는 경매장과 미술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와 정보가 가득 들어 있다. 경매장 회전판이 돌아갈 때 알아야 할 여섯 가지이야기(1월), 대지미술가 크리스토 부부와의 인터뷰(3월), 미술품 감정 TV쇼 현장에서(5월), 소더비 경매학교 중간고사 형식으로 풀어본, 가짜와 진짜 그림을 구별하는 방법(7월), 미술 문외한들을 위한 그림감상 가이드(9월), 소더비와 크리스티에서 배운 것(11월) 등. 이 글들에는 현장체험과 함께 유용한 지식이 담겨 있다.
다섯째, 지은이의 스케치 작품이 주는 색다른 즐거움이다. 지은이는 미술 전공자답게 곳곳에 자신의 스케치와 콜라주 작품을 배치하고 있다. 그 스케치들은 경매 현장, 뉴욕과 여행지의 풍경, 일상사 등을 포착한 것이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여 생생한 현장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감상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섯째, 지은이의 개성적인 시각과 표현으로 글은 더욱 빛이 난다. 체질적으로 자연스럽게 익힌 그녀만의 시각과 표현은 상투성에 물들지 않고 아주 신선해 더욱 마음을 끌고,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그(요요마)의 첫인상은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전골요리’ 같았다. (……)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마치 액체처럼 자유롭게 모양을 바꿔 이내 신나게 어울리는 모습이, 어떤 재료를 넣어도 잘 어우러져 나름의 맛을 내는 전골요리를 연상케 한 것이다.” (「내 사랑 요요마」에서)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그림도 바뀌는 모양이다. 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으며 성숙해지는 것처럼 미술작품을 대하는 마음도 세월과 더불어 변하는 것 같다. 꼭 화가가 아니더라도 나는 미술로 사랑을 표현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부모님에게서 배웠다. 미술도, 인생도, 사랑도 다 한곳에서 출발한 거나 다름없다…….” (「선물」에서)
“숙소로 돌아오면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 백야현상으로 밤 11시에도 해가 지지 않던 이곳의 아름다운 기억이 단 천일 동안만이라도 뇌리 속에 싱싱하게 살아 있기를……, 꼭 다시 올 수 있기를…….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트레비 분수는 알래스카의 어디쯤에 있을까. 만약 소원을 들어주는 트레비 분수가 있다면 주머니 속 동전을 다 쏟아버리고서라도 다시 오고 싶다.”(「알래스카에서 맛본 싱싱한 추억」에서)
“왠지 만난 적이 있다고 믿고 싶어지는 마법 같은 그림…….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으면 좋겠네……. 마치 오르골 위에서 춤추다가 막 내려온 인형 같은, 도자기로 빚어 만든 것처럼 투명하고 신비한 저 17세기의 소녀와…….”(「베르메르,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에서)
어떤 페이지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이런 감성은, 내부에서 저절로 넘쳐흐른 것이어서 글의 밀도를 한껏 높여준다. 이런 글들은 자기 마음의 소리에 정직한 사람이 아니면 쉽게 쓸 수 없다. 상큼발랄하고 신선한 표현들이 싱그럽게 가슴을 물들인다.
경매장 가는 길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다!
사실 미술품 경매 이야기는 낯설다. 미술사나 미술 관련서가 작품과 화가 중심으로 전개되다 보니, 경매이야기는 주변부 중에서도 주변부 취급을 받기 일쑤다. 보통 사람들에게 미술품 경매는 생소할 뿐만 아니라, 접근이 쉽지 않다. 미술경매 분야는 비하인드 스토리나 화젯거리가 굉장히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사람들만 드나들고 있다.
이 책은 지은이가 세계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미술품 경매 현장을 생중계함으로써, 낯설고 색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을 한층 자극한다. 그래서 미술시장 종사자나 작품 수집에 관심이 있는 사람, 미술품 경매사나 그림감정사를 꿈꾸는 사람, 미술계의 뒷이야기가 궁금한 독자, 세계미술시장이 궁금한 작가들에게 이 책은 시원한 생수를 제공한다.
경매장 가는 길은, 미술품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아니다. 그 미술품을 만나서 작가를 만나고, 컬렉터를 만나고, 역사와 세상을 만나는 길이다. 그리하여 경매장 가는 길은 작품을 매개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