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 길 위에서 들려주는 노래
"돌이 눈물이 되고 눈물이 돌이 되는" 세월만큼 지나야, 아니 영원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끝나지 않을 시인의 길. 그리하여 시인은 "온 세상이 빠른 것을 향해 빨리 탈것을 향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솟구치고 떨어지고 정신없이 내달리"고 "속도전으로 치달리며 우우 몰리는 이때" "걷기 시작했다".(「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이 도저히 감당할 길 없는 거리", 그 길 위에 "무언부호의 점들처럼"(「내게 슬픔이 많은 까닭은· 둘」) 발자국을 남긴다. 발자국의 수효로 세상의 넓이나 둘레를 재는 사람, 인생이 몇 걸음이나 걸을 수 있는 시간인지를 재고, 몇 산이나 오르고 꽃피는 것은 몇 번이나 만날 수 있는지 가늠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하니, 과연! 길 위에 있는 시인은 산 두 번 오르고 사람의 한 생애를 알고(「문수산 두 번 오르니」), 눈 한 번 깜박하는 사이 팔만사천의 생멸이 있음을 헤아린다. 저물녘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서도 시(詩)를 예감하고, 솔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에서도 우주를 본다.
사람 사는 일 일념삼천(一念三千) /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 / 팔만사천 생멸이 있다 하는데 // 내 맘에는 그것은 아무래도 / 끝없는 감격일 것이니 // (……) // 가령, 눈물 한 방울일지라도 / 내 몸이 어느새 / 팔만사천 번쯤의 의논 끝에 넌지시 밀어내는 눈물이라면/
―「내 몸이 어느새」 중에서
다만, 이 저물녘, 추포(秋浦)의 풀벌레 소리 / 무슨 응급의 전화벨 소리 같은 / 기쁨인지 울음인지 모를 / 예사 소리 예사롭지 않아 / 시 한 줄 예감할 뿐이네.
―「대명포구에서」 중에서
솔잎이 이슬방울 / 꿰었는가 싶었더니 // 이슬들 / 이슬 속 솔잎 밀어내고 // 허공에서 이슬들 / 솔잎 밀어내고 // 아득하구나 / 저 우주로… ―
「이슬 속의 솔잎」 전문
이 시집에 실린 많은 작품은 시인을 "시라는 연료로 독자들을 저 상상력의 대기권 바깥으로 밀어올리는 사람" "유인우주선을 쏘아올리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데 동의한다. 지금 여기, 지구라는 별에 국한된 우리 삶의 무대를 단숨에 우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적 상상력은 미물과 누추한 일상을 보듬고 쓰다듬는 시인의 자세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찮은 생을 끌어안는 드넓은 우주적 상상력의 시편들
이번 시집은 특히 시력(詩歷) 삼십 년과 이순을 동시에 맞는 김정웅 시인의 시집이라는 점에서 의미 깊고 값지다. 일방통행으로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순리의 언로를 가로막지도 않으면서 생을 너그러이 끌어안는 시 편편에서 새삼 시인의 연륜이 느껴진다. 바늘구멍만한 마지막 숨통만은 조여서는 안 되며, 좁은 문 안팎을 모두 잊고 문지방이란 문지방은 그냥 활짝(「좁은 문」) 열어젖혀놓는 관용과 화해와 용서의 자세도, 기쁨은 가벼워 빨리 사라지고 슬픔은 무거워 오래 남는다(「기쁨에 죽고 슬픔에 산다면」)는 삶에 대한 통찰도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일까. 시인은 다만 주어진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 "겨우 몇 날, 자지러질 듯 겨우 몇 날 발광할 듯 진땀 내음 나는 봄꽃 아니라 한여름 석 달 피는 듯 지고 지는 듯 피"면서 "심심한 마음이면 아주 심심해질 때까지 헛것이면"(「석 달 열흘 배롱꽃처럼」) 또 그대로, 오래도록 시를 쓸 것이다.
시인의 딸 김희정이 표지 일러스트레이터로 참여해 깊고 넓은 시인의 시심을 그림으로 만들어냄으로써 시집을 더욱 빛내주었다.
우주를,인간의 우주를 어찌 알알이 다 헤아리랴!
김정웅 시인은 우리 삶의 무대가 적어도 지구라는 이름의 이 비좁은 별에 국한된 것은 아니란 것을 알려주려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시간이 과연 이 답답한 현생(現生)이 전부인가 하는 오래된 숙제 앞에 결가부좌로 앉아 좀더 반듯한 대답을 내놓으려는 성실한 학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윤제림(시인)
김정웅
1944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으며,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배우일지』 『천로역정, 혹은』이 있다. 1989년 『천로역정, 혹은』으로 제8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국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 2004년 12월 15일 초판 발행
* ISBN 89-8281-917-7 02810
* 121*186|144쪽|값 7,000원
눈물의 돌
돌의 눈물
시의 돌에 새겨보는
「아무리 다듬어도 끝낼 수 없는」 중에서 \n\n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