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등단한 이래 시집 『까마귀떼』 『수수깡을 씹으며』 『빈집의 꿈』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눈 내리는 마을』, 판소리평론집 『판소리 더늠의 시학』 등을 상재한 시인이자 평론가 정양이 새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를 선보인다. 우리 시단에 커다란 나무로 우뚝 선 원로 시인인 그는 또한 안도현, 박남준, 이병천 등 여러 시인 소설가 들의 스승인 것으로 유명하다. 사람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치열한 자기 반성, 곧지만 넉넉한 시심(詩心)을 들여다보면 집집마다 뻗어 있다는 마현리의 은행나무 뿌리처럼 여러 문인들에게 문학의 수액을 공급했음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게 된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다시 불러낸 마현리 이야기
시절도 사람도 다 떠난 지평선 허허벌판에 은행나무 한 그루 우뚝 서 있다. 김제 벌판 가장 키 큰 나무 되겠노라, 제일 오래 사는 나무 되겠노라 다짐한 적 없었지만, 제 온몸을 뒤흔드는 남의 울음소리를 제 것인 양 가슴애피 담아, 육백오십 세를 훌쩍 넘긴 은행나무. 이 시집의 독자들에게 「은행나무 배꼽」의 모델이 된 그 나무를 한번 찾아보시라 권하고 싶다. 만약 그렇거든, 당신 앞에 훤출한 듯 껀정한 듯한 초로의 사내가 그 은행나무를 다독이는 것도 볼 수 있으리라. ‘더 부대낄 일이다’ 쓰다듬는 그 사내가 이제껏 순례자로 시종하여, 이제는 순방의 대상이 된 정양 선생, 바로 그분이다, 짐작해도 무방할 것이다. 김병용(소설가)
2부로 구성된 이 시집의 1부는 시인의 고향인 김제 평야와 익산 사이 위치한 마현리, 말 잔등을 닮은 고갯길을 끼고 있다 하여 마재라 불린 그곳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년 시절이었던 6.25 때부터 5.16에 이르는 질곡 많은 시절을 그곳에서 산 시인은 전쟁과 관련된 기억, 전후 어려운 시절을 견뎌온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풀어낸다.
징용을 피하려고 전쟁 내내 벙어리 행세를 한 홀애비 기수 아저씨(「아 그 장구재비가 글씨」), 시집올 때 가마 속에서 방귀를 뀌었다는 루머에 평생을 시달린 꽃각씨 할머니(「꽃각씨 할머니」), 보리타작을 기다리며 “허천나는 삐비나 뽑아 먹”던 기억(「보릿고개」), 소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쇠자래기로 죽을 쑤어 먹고는 학교 가는 길, 취해서 논두렁에 픽픽 쓰러지던 아이들(「쇠자래기죽」), 보리밥 먹고 줄방귀를 뀌어대는 방귀 ‘금메달 깜’ 상학이(「보리방귀」), 새벽에 물 속에서 ‘그짓’ 하다가 ‘그거시’ 안 빠져갖고 죽은 남녀 시체가 떠올랐다는 화순둠벙(「화순둠벙」) 등 정사(正史)로 기록되진 못했으나 우리가 겪어내고 살아낸 것이 틀림없는 “아직 신화가 되지 않은 그런 이야기들”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나 지렁이 같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 그 자체로 훌륭한 풍속사이자 근대사가 된다. 그러나 이는 이미 완료된 것이 아니라 그때로부터 죽 이어져 지금에 이르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노시인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 마재 이야기는 신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된다.
잃어버린 길 또한 길 아닌가
2부에는 근간에 쓴 시들과 다시 손본 시 몇 편을 모았다. 시인은 미당의 장례식 즈음에 아픔과 용서에 대해 반추하고(「어금니」), 과열을 방지하는 차단기가 달린 가전제품을 보며 “가슴 좀 두근거리면 안 되나/합선 좀 되면, 차라리 망가지도록/불꽃 좀 튀면 안 되나”라며 갈증과 사랑과 혁명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다가(「별」), “80년대식 자랑과 열정과 사랑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고물차에 대한 애착을 통해 변해가는 세상과 변치 않는 신념의 괴리를 묘사한다. 그러나 “누가 보거나 말거나”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처럼 “짓이겨도 짓이겨도 새빨간 거짓말처럼” 봄이 온다는 확신으로(「꽃불」) 세상을 견디고 걸어간다.
노쇠해가는 육신을 서글퍼하고, 유턴할 길 없는 하행선을 따라가는 시인이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라 말하는 뜻을 우리는 쉬이 짐작하기 어렵다. 길을 잃은 적이 많았다는 것인지, 잃고는 싶었으나 잃은 적 없다는 뜻인지. 그러나 이는 소설가 김병용이 말했듯 어떻게 읽어도 좋은 ‘즐거운 오독’을 의도한 것이리라. 삶의 길 위에선, 길을 잃어도 걷고 있는 한 그곳이 또한 길이 될 것이므로.
가파른 시간의 협곡을 통과해온 고단한 역사와 시인의 서러운 행로가 숨쉬는 이 시집 곳곳엔 “빈집 / 문기둥 옆” ‘작대기’처럼 숱한 비애와 해학이 창상을 숨기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짐으로써 존재의 몸을 얻는지 생멸을 시작하는 문법의 웃음소리가 소란하다. 그 웃음이 슬픔으로 이동하는 찰나, 쓰레기통에 던지는 1부 서시의 개똥 속에 자란 ‘미나리싹’, 2부 서시의 피 묻은 ‘어금니’, 마지막 시의 행방을 모르겠는 ‘잉어’ 들은 짐짓 신화적 농경문화의 소멸을 알리는 마지막 타종의 기표로서 존재한다. 곡창지대가 품은 정양 시인의 미망의 작은 이 서사들은 멀고도 아름다운 우리 시의 길에서 갈피갈피 오래 기억될 것이다. 고형렬(시인)
단숨에 시집을 읽었다. 찡하도록 가슴이 아프기도 했으며 배를 잡고 낄낄거리기도 했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마현리와 같은 마을 풍경은 이 땅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젊은 날에 미당의 『질마재 신화』를 보며 시를 이렇게 감칠맛나게 쓸 수도 있구나, 했었다. 질펀하고 무르익은 선생님의 시집은 그러나 사뭇 달랐다. 선생님의 뒷등이 그렇게 쓸쓸했던 이유, 질마재에는 보이지 않는 시대에 대한 아픔과 고뇌와 통찰, 그리고 보듬고 껴안으면서도 겉으로 내비치지 않는 사나이의 눈시울 뜨건 속눈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흑백의 풍경인가. 박남준(시인)
* 2005년 4월 8일 발행
* ISBN 89-8281-961-4 02810
* 121*186 | 160쪽 | 값 7,500원
* 담당편집 : 김송은 이상술(031-955-8862/8864)
너는 지금 거슬러가는 중이냐
휩쓸리는 중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