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에 관한 소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로 제8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작가 이해경이 세번째 장편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을 선보인다. 들국화의 노래와 어우러진 청춘의 방황을 서정적으로 그린 두번째 장편 『머리에 꽃을』을 발표한 지 이 년 만에 내놓은 이 작품은 “삶은 사막이 되었고, 열정은 권태가” 된 시대의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세 남자와 한 여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파혼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결혼하는 여자” 연우와 그녀를 둘러싼 세 명의 남자들이다. 연우의 첫번째 남자는 ‘형’이었다. 연우는 ‘형’의 변심 덕분에 그와의 답답한 관계를 본의 아니게 청산하게 되었고, 다른 남자를 만나 결혼에 안착했다. 그런 그녀에게 또다른 남자 ‘희수’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연우와 희수의 위태로운 만남이 이 소설의 본류를 이루며 흘러가는 가운데, 이 ‘불륜’을 둘러싸고, 과거의 ‘형’과 지금의 ‘남편’이 맞물려 만드는 와류가 이 소설의 지류를 이루며 흘러간다.
야구에 대한 태도로 알아보는 남자의 세 가지 유형
형: 성공한 마초.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야구장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
특징: 이런 남자와 연애하는 여자는 남자보다 앞서지 않는 자세를 익히려고 노력해야 한다.
남편: 지루한 성실남.
“제가 왜 야구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거든요. 야구를 보면 인생이 보이죠.”
특징: 첫날밤,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완전히 소유하지 못했다는 허전함으로 그늘이 짐.
실망이 의처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 각별한 유의를 요함.
희수: 무능한 매력남.
“저기 봐요, 야수들이 전부 건들거리고 있죠? 야구에 뜻이 없어 보이죠? (……) 그런데, 저러고들 있다가 투수가 와인드업이나 셋 포지션에 들어가면, 동시에 모두 허리를 싸악 낮추면서 굽혀진 다리는 팽팽해지고 상체가 거의 땅과 수평이 될 듯, 순식간에 수비자세를 갖추는데…… 전 그 순간이 너무 좋아요. 최대한 릴랙스…… 그러다가 한순간 집중력을 최고로 끌어올려……”
특징: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할 줄 아는 남자.
만약 여자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이 남자일 수밖에 없다.
이토록 불성실한 불륜
연우와 희수는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만나고 친구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헤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연우는 아직 ‘형’과의 지지부진한 연애를 지속하고 있었다. 두번째 다시 만났을 때 연우는 지루하지만 성실한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연우가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남편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 희수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이후 세번째 만남이 이어진다. 애초에 그들은 ‘합법적 만남’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듯하다. 지루한 일상을 환기시킬 만큼만, 들키지 않을 만큼, 위험하지 않을 만큼만 만나고 헤어진다. 희수와의 사랑이 조금 더 뜨거웠더라면 일상이 조금 더 비루했더라면 연우는 희수와 함께 떠날 수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가능한 것의 한계를 찾아내는 유일한 길은 그 한계를 조금 넘어서 불가능한 것 속으로 디뎌보는 것”이라지만 연우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허황되고 어수룩한 오해”라는 것을.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도 사랑이라는 ‘천상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당신은 아직도 사랑을 믿는가
따라서 연우는 “세상살이는 밤낮없이 연중무휴로 벌어지는 가면무도회와 같은 것. 서로 마음에 드는 마스크와 짝을 이뤄 멋지게 한 바퀴 돌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인가”라는 삶의 자세를 갖고 있다. 그녀는 “여러 개의 가면을 장만해서 그때그때 골라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의 가면을 직시한다. 이를테면 성공한 완벽주의자 형은 “자신을 철저히 감추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가면을 빚어낸” 사람이고, 남편의 질투와 고통은 “날마다 지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무게를 못 이기고 가면을 벗어던진” 남자의 맨얼굴이며, 희수는 자신의 맨얼굴을 가릴 수 있을 때만, 예컨대 “취해야 자신의 매력을 가장 자연스럽게 발휘할 수 있는” 딱한 남자이다. 연우가 볼 때 우리들은 모두 위태롭게 흘러내리는 가면을 간신히 붙들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또다른 가면을 준비해야 하는 ‘가면의 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위태로운 가면극 뒤에 실존의 울혈이 도사리고 있다.(신형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사랑을 믿지 말고 다만 속아주기를. 그래서 마침내 사랑을, 그 어렵고 힘든 사랑이 어디에나 있음을, 믿게 되기를. 그것이 비록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남게 되는 미련이라 할지라도.
―‘작가의 말’ 중에서
불륜서사가 더러 빠지곤 하는 감상의 범람을 제어하고 연애서사가 탐닉하곤 하는 비현실적인 탈주 욕구 또한 적절히 제어하면서, 이 소설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내면 풍경 하나를 담담히 수습해낸다. 이 담담함 뒤에, 가면의 생을 살고 있는 우리들 실존의 울혈이 도사리고 있다. 그게 자꾸만 밟혀서, 가면의 생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가가 성찰하고 있는 삶이라는 연극의 내핍을 살펴야 했다. 그러나 어찌 이렇게만 읽을 수 있겠는가. 사랑 이야기의 품은 넓어서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다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