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바기날 플라워」 외 5편의 시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래 여성의 몸과 내밀한 욕망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형상화한 신선하고 도발적인 시를 선보여온 진수미의 첫 시집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는 『문학동네』 『창작과비평』 등 여러 문예지들에 발표한 41편의 시가 실렸다.
‘몸’의 재발견, ‘몸’을 바라보는 시선의 재발견
진수미 시의 독특함은 여성으로서의 ‘몸’의 발견에서 시작된다. 등단작인 「바기날 플라워」에서 자신의 성기를 들여다보며 “나/물오른/한 줄기 꽃대였다네”라고 노래한 것은 도발적이면서도 자기 긍정의 생생한 기쁨을 보여준다. 이는 “사포는 아니고/나혜석도 아니고/성모 마리아는 더더욱 아닌//출렁이는 젖가슴과/늘어진 둔부를 가진/닳을 대로 닳은”(「아비뇽의 처녀들」)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비극적 천재도, 성녀도 아닌 평범한 지금-여기의 여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몸 자체는 가부장적인 시선이 욕망하는 성적 대상도 아니며 무조건적으로 아름답고 이상적인 것으로 추앙되는 절대적인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여성의 몸은 그렇게 가치중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의 시에는 고통스러웠을 몸의 일상을 겪어온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다. “국어사전을 모셔놓고 ‘성기’ 같은 단어나 찾으며 낄낄대는”(「구름의 공회전」) “명찰 없는 남학생들”(「수리공」)은 여자애들을 희롱하고, ‘의자’로 표상되는 남성은 때론 “앉으면/단두대가 되는 의자/철커덩 발목을 잠그는 의자/피융 전기가 도는 의자”이며 “다섯 살 때인가 의자가 나를 삼켰어요/(……)/아직도 놓아주질 않아요”(「의자」)에서 보듯 악몽처럼 기억을 지배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을 둘러싼 “아버지의 머리 벽은 아직도 단단하다.”(「다리 밑의 아이들」) 그러나 그녀들은 저 옛날 역신에게 아내를 강탈당한 처용이 그날 밤의 공포를 털어놓으며 “한없이 어려져/한없이 좁아져/어깨 하나로/꺼이꺼이” 울 때 너른 치마폭으로 포용해주기도 할 만큼 강하다(「처용 短歌」).
날 선 언어, 낯선 이미지, 싱싱한 상상력
이렇게 발견된 ‘몸’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문학평론가 허윤진은 진수미 시에는 눈, 나아가 시선의 문제에 대한 의식이 다양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시 속의 여성들은 “깨어진 눈”(「테레사 학경 차를 위한 받아쓰기 예제」), “나는/날 때부터 눈동자를 갖지 못했다”(「봄, 뇌경색」) 등에서 보듯 자신의 시선을 갖고 있지 못하다. 여성을 바라보는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선은 여성을 억압하고 침묵을 강요한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 눈동자가 비웃고 있었다. 시선에서 긴 꼬챙이를 꺼내더니 말풍선을 모조리 터트리는 것이었다. 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줄줄 새는 물방울을 쳐다보았다. 물인가 했더니 침이었다. 천년 묵은 만년 묵은 호박(琥珀)이었다. 방울마다 내가 키운 벌레가 갇혀 있었다. 호박에서 숨겼던 벌레들이 풀려났다.”(「무성만화 상연기」) 여성의 오래된 발설 욕구는 시간의 압력으로 보석 같은 결정이 되었다. 시선과 언어를 빼앗기고 되찾는 과정은 무성만화의 컷들이 쉴새없이 넘어가듯 스릴 있게 전개된다. 그녀들은 남성과 동일한 시선으로 세계를 재현할 수 없으며 남성과 동일한 언어로 세계를 논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화가가 성질이 다른 색과 형상들을 즉흥적으로 화폭에 그려내듯이 ‘표면적’으로는 논리적인 인과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이미지들을 배열하고, 따라서 각 행의 이미지 사이에는 의미론적인 불연속의 지점들이 생긴다. 이러한 불연속면은 비정상적이고도 따뜻한 광기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이미지는 “후렴의 꼬리는 자꾸 불어나”(「다리 밑의 아이들」)듯 자꾸 확장되어 다른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고, 그러한 상상력의 ‘공회전’을 통해 이미지는 자꾸만 불어나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시어 사이사이의 틈에서 뻗어나오는 낯선 이미지에 몸을 맡기면 불온한 욕망이 스멀거리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진수미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돌출되어 있는 육체들이다. 이것들은 ‘눈동자를 갖지 못했’으므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육체들의 착종은 불결하게 세계를 메운다. 그 세계 속에서 템포가 빠른 이미지들이 거래되지만, 거래는 실천되지 않는다. 말들은 자주 탈골되어 분탕질된다. 간혹 폭풍이 지나가지만 그 경로는 추론될 수 없다.
그의 시를 지배하는 것은 상상력의 공회전이다. 상상력이 목표를 가지고 대상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반대로 대상이 상상력을 향해 뛰어든다. 대상은 우연히 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추문에 자신을 동원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시인의 상상력은 덧난다. 우리가 진수미 시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은 바로 이 잉여라 할 것이다.
이수명(시인)
진수미의 시에서 각 행의 이미지 사이에는 의미론적인 불연속의 지점들이 생기곤 한다. 이것은 언어를 회화적으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화가가 성질이 다른 색과 형상들을 즉흥적으로 화폭에 그려내듯이 ‘표면적’으로는 논리적인 인과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이미지들을 배열한다. 이미지 사이의 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형상화하는 이미지들을 일상적인 논리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독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이미지가 주는 낯선 느낌 자체에 몸을 맡기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허윤진(문학평론가)>
* 2005년 8월 16일 발행
* ISBN 89-546-0014-0 02810
* 121*186 | 112쪽 | 값 7,5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김송은(031-955-8865/8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