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배 신화의 원형 이미지와 상징체계를 연금술의 과정으로 파헤친 본격적인 상징해석서
『성배와 연금술』은 신화와 상징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상소네티의 주요 연구서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서 왕 전설의 탁월한 비교(秘敎) 연구가인 저자는 중세의 신비를 대표하는 성배 이야기를 통해 원시시대부터 만들어져온 상상력의 원형 이미지를 탐구하기 위해 연금술, 샤머니즘, 아서 왕 이야기의 몇몇 주제, 기독교 이전 시대의 북유럽 신화, 스칸디나비아 신화뿐만 아니라 이란의 이슬람교와 인도 불교까지 아우른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와 켈트 신화의 영향을 받아 성배에 신비롭고 거룩한 물건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부여한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미완성 소설 페르스발 혹은 성배 이야기를 주 텍스트로 하고, 크레티앵의 전통을 이어받은 후속작가들의 손을 거쳐 켈트 문화의 다양한 소재로 전혀 새로운 영적 모험을 그린 성배문학을 아우르면서, 중세의 중요한 키워드인 성배와 연금술이 갖는 상징성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특히 저자는 페르스발의 영적 모험을 통해 크레티앵의 시대와 후속담의 시대에 어떤 상징적이며 연금술적인 울림이 배어나는지 살피고자 한다.
이 책은 본격적인 상징해석서이다. 갈림길이나 언덕 정상에서 만나는 나무는 식물의 형태로 나타난 헤르메스로 보이며, 세계수는 인류가 빽빽한 물질의 영역으로부터 멀리 뻗은 영의 영역으로 상승할 수 있는 잠재력을 상징하고, 흐르는 강물은 ‘물의 경계’를 그리며 존재론적 공간을 의미한다. 신화를 스토리 중심으로 읽는 데 치중해온 독자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성배의 신화에 나오는 모든 이미지들이 상징적 함의라는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필멸의 인간 조건을 불멸의 신적 현존으로 변환시키는 존재의 연금술
켈트 문화의 불멸의 솥을 대체한 그리스도의 피의 잔인 성배는 중세 시인의 몽상과 상상력을 사로잡았으며, 빛나는 기사도 정신의 중심이 되었다. 그후 800년이 지난 지금도 성배는 여전히 그 신비로움으로 우리를 매혹시킨다. 이 책은 영웅의 영묘한 육체의 복합적 ‘반영 이미지’들, 그리고 그의 필멸의 인간 조건을 신적 현존으로 변환시키는 연금술 과정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기독교에 앞서 존재했거나 기독교 밖에 존재한 통과제의적 체계를 통해 페르스발의 모험이 어떻게 금속을 금으로 변환시키는 연금의 연속적 단계들을 표현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성배 이야기는 영적 탐구의 이야기이며, 존재론적 변환의 꿈, 즉 연금술사의 꿈이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성배를 찾아 떠나는 것은 존재의 본질에 이르고자 갈망하는 것으로서, 성배를 찾아 떠나는 페르스발의 모험은 연금과정, 즉 심리의 개체화 과정을 보여준다.
페르스발이 성배탐색 중에 만나는 성들은 예사 성들이 아니다. 그것은 연금과 통과제의가 이루어지는 상징적 장소들이다. 페르스발의 모험에서 상징적이며 연금술적인 ‘울림’을 살피는 일이 중요한 까닭은 전승 문명들이 모두 그렇듯이 그 시대의 사고 체계에서, 세계는 기호들로 성좌를 이루며 의미를 지녀야만 이로정연하다고 여겨졌고, 당시의 복음과 이교는 연금술의 메시지에 의해 줄곧 조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은 성배의 상징 해석에도 드러난다. 분석에 의하면 성배는 그릇이자 빛인데, 그것은 연금술 특유의 물질적 상상력을 반영한다. 물질이라는 형식 속에 정신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요가 수행의 토대가 되는 영묘체의 개념도 동일한 상상력을 담고 있다. 차크람이라는 영적 에너지의 집결 센터가 물질적 육체의 분신인 에테르체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육체는 ‘만질 수 있는 영혼’이 된다. 저자가 “가시(可視)계와 비가시계, 지상과 천상, 육체와 영혼의 이음매를 복원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물질과 비물질의 결합을 통한 초월이라는 연금술적인 초월 방식을 뜻한다.
저자는 크레티앵 드 트루아와 후속 작가들의 성배 이야기에서 용기(容器)로서의 성배의 형태가 거의 무화되고 유독 그 찬란한 빛이 강조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면서, 성배의 빛을 고대 이란의 ‘영광의 빛’과 접근시킨다. ‘영광의 빛’도 ‘성배’도 특정한 하나의 형태를 취한다기보다는, 비슷한 형태들로 나타난다는 저자의 지적도 흥미롭다. ‘영광의 빛’이 잔, 보석, 창, 불꽃의 형태를 취할 수 있듯이, ‘성배’는 물리적으로 여러 모습을 취할 수 있으며(단지, 잔, 사발, 보석), 창, 검 등을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주와 존재를 구성하는 생명의 힘인 초월적 현존의 상징이 시공간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지만, 그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상징이 가리키는 대상은 인간의 내적인 마음의 세계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강의 기사 페르스발의 영적 탐색이 끝나는 어부왕의 방, 즉 황금빛 하늘 아래서 불가사의한 검, 부러진 칼이 다시 이어지는 장면은 이 책의 백미이다.
성배의 길과 이미지의 체제들
성배를 찾아 떠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차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벌이는 것이고, 그를 위해 화석화의 위험이든지, 미로의 위험이든지, 함몰의 위험이든지, 시간의 차원을 둘러싼 위험들에 맞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사 페르스발은 성배를 찾아나선다. 미로와 같은 길에는 온갖 시련과 적들이 도사린다. 붉은 갑옷을 입은 왕, 무덤에서 출현한 무시무시한 검은 갑옷의 기사, 황량한 성을 지키는 광포한 사자 등등…… 무수한 시련과 함께 환상의 세계도 나타난다. 말들이 살아 움직이는 남색과 금색의 체스 판, 흰 사슴, 호박으로 장식된 금빛 방들, 상징의 별과 꽃으로 장식된 옷을 입은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지혜로운 아가씨…… 그리고 원초적 힘들을 상징하는 동시에, 탐색에 나선 기사가 거쳐야 할 물질의 갖가지 상태들을 상징하는 일곱 성(城)의 세계……
우리는 빛의 잔을 찾아 떠난 페르스발을 뒤따라가보아야 한다. 초자연적 모험들을 겪으며, 어려운 무훈을 세우며, 페르스발은 미로와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가 전환을 이루는 연금술의 기나긴 과정을 밟는 영광의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의식으로 빽빽이 들어찬 둔중한 ‘자기가, 단계별로 시련을 거듭하면서 갈라지고 터져 분해와 풍화를 겪은 뒤, 마침내 가벼워져, 꾸준히 좀더 영묘하고 좀더 폭넓은 차원, 즉 ‘자아’의 여명을 예고하는 새로운 지평으로 스스로를 여는 길이다.
오늘날 잔혹한 에고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속세를 벗어나 영적 세계로 가는 길은 더할 나위 없이 불확실하다. 공격적인 에고를 끊임없이 경계하는 사람만이 에고를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 ‘성배’의 행렬이 피 흐르는 창의 행렬로 시작되는 까닭은 바로 전사와 같은 맹렬한 금욕이 따르지 않으면 태양처럼 반짝이는 고귀한 잔의 출현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