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등단해 1996년 첫 시집 『처형극장』을 세상에 내놓았었다. 탐미적인 언어로 죽음과 타락의 세계를 실연해 보이는 그 젊은 영혼의 뜨거운 도발에, 평단과 독자들은 그에 합당한 주목과 기대를 보낸 바 있다.
그후 지금껏 시인은 어쩌면 산문가로 더 이름을 날렸다. 문화비평집 『루트와 코드』를 비롯해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진 그의 산문은 문학과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채로운 영역의 텍스트 사이를 종횡하며 시인 특유의 날카로운 감식안과 감수성을 유려하고 감칠맛 나는 문장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산문에 호의를 품는 이들이 늘고 그들이 시인 강정의 새 시집을 궁금해하고 기대하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 그의 두번째 시집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은 그가 그간 시인이라는 본업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산문가가 아닌 시인 강정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재확인하게 해준다.
유전하는 시간, 죽음과 신생의 우주적 순환
시집은 우주적이고 존재론적인 죽음과 신생의 예감으로 가득하다. 시인은 광대무변한 시공간을 유전하는 존재의 생과 멸의 풍경을 낯설고 촘촘한 언어와 즉물적이며 우주적인 이미지들로 눈부시게 형상화해낸다. 그곳에서 “세계는 수천 광년 전에 죽은 어느 별의 지난 역사를 새로이 반복”하고, “내게서 뻗은 시간이 또다른 나를 / 산화한 유성의 잔해로 빚어 / 으스러진 모래알 속에서 끄집어낸다”(「우주괴물」). 시인은 “마침내 우는 아이를 내 몸에 다시 넣어 / 기어이 우는 아이가 내 몸을 찢고 다시 태어나기를”(「엄마도 운단다」) 열망한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 그 “새로운 인간은 대지와 하늘, / 종족과 국가를 불문하고 별을 알(卵) 삼아 / 두터운 시간의 견갑골을 깨뜨린다”(「우주괴물」). 그럴 때 시는 우주의 시간을 거슬러 다시 만들어낸다. “그것은, 성긴 시간의 마디들을 새로이 조이고 묶어, 전혀 다른 시간의 얼개를 펼치는, 시간의 동력줄 같은 것”(「거미인간의 초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우주가 나의 파편이기 때문이다”(「거미인간의 시―하오의 독백」). 그리하여 세계와 자아, 존재와 존재, 서로 다른 시공간이 한데 뒤섞여 회통하는 우주적 카니발이 펼쳐진다.
시인은 우주와 시간, 땅과 바다, 태양과 별, 불과 물 같은 익숙한 신화적인 뉘앙스를 지닌 단어들을 쓰고 있지만, 그의 시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가 말을 부리는 방식은 시어의 익숙한 의미들을 끊임없이 탈각해나가는 것이다. 단어뿐 아니라 문장의 수준에서도 그렇다. 단어와 통사들이 겹치고 쌓일수록, 그것들은 의미를 드러내기보다 스스로를 계속해서 낯설게 만든다. 그것은 말하자면 언어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직면하기 위한 시인의 고통스러운 몸짓이다. 발문에서 함성호 시인이 이 시집의 표제작을 “우리 시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 중의 하나”라 극찬하며 이 시가 언어와 상징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씌어진 절창임을 설명해준 것처럼, 그의 시는 견고하고 촘촘한 언어로 언어의 불모를 자진하여 겪어내며 그것을 노래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강정의 시는 최근의 젊은 시들이 자극적인 감각과 난해한 요설로 점철되어 있다는 일각의 비판과 우려를 다른 각도에서 불식시킨다. 그의 시는 말단의 감각보다는 정제된 관념과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사유로 충만하며, 손쉬운 의미망을 피해가는 그의 전위적인 시도는 언어에 대한 투철하고 염결한 의식에 기반해 있다. 그가 최근 주목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성과를 선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그들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한 연재글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약진에 지지와 옹호의 뜻을 표하며 스스로를 ‘한 쇠잔한 바퀴벌레’(‘바퀴벌레’는 그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낸 의미심장한 상찬의 어휘다)라 칭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시집으로 하여 이미 그는 ‘선구적이고 독보적인 바퀴벌레’의 위치에 선 것이 아닐까.
* 2005년 12월 말, 시인은 홍대 모처에서 인디밴드 ‘모레인’과 특별한 공연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한대수의 <하루 아침>을 비롯한 올드록 넘버 세 곡을 부르고, 자신의 시 두 편을 즉흥연주에 맞춰 낭송했다. 시와 음악과 산문을 아우르는 그이기에 가능한 장면일 것이다. 그 광경을 상상하며 읽어도 좋겠다. 거친 록 사운드에 실려 전해지는 격렬한 그의 목소리가 이 시집을 멀리서 에워싸고 있기도 한 것이니까.
암흑의 허공에 작열하는 사이키델릭한 불꽃놀이
모든 것이 애매하다. 영원한 우주와 필멸의 인간이, 남자와 여자가, 어머니와 자식이, 별과 항문이, 낡음과 미래가, 인간과 짐승이, 시간과 공간이 태초와 현재가, 구분되지 않고, 그래서, 기이한가? 아니다. 더 편안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그의 기이한 이미지들은 기이하게 편안하고, 따스하다. 이 모든 것의 배후가, ‘기어이’ 울음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는 아이를 내 몸에 다시 넣어/기어이 우는 아이가 내 몸을 찢고 다시 태어나기를’…… 김정환(시인)
강정의 이미지는 검은 하늘에 그어지는 사이키델릭한 불꽃놀이 불빛이다. 눈이 부시다. 이 작열은 검은 하늘, 암흑의 캔버스 때문에 기본적으로 가능하다. 그 이미지는 추락한다. 과감히, 매우 빠른 속도로. 그래서 그것은 폭포 같다. 폭포는 기둥이고 따라서 남근이다. 그는 각종 환경호르몬 때문에 남근들이 흐물거리는 시대에 보기 드문 빳빳한 남근 이미지를 지닌 시인이다. 나는 그의 빳빳한 물기둥을 본다. 매 초, 그 물기둥들은 허망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급기야 웅덩이가 생긴다. 흥건한 그 웅덩이는 욕망의 웅덩이이고 그때 깨닫게 된다. 그의 검은 하늘이 욕망의 물웅덩이인 것을. 성기완(시인,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
* 2006년 1월 5일 발행
* ISBN 89-546-0070-0 02810
* 121×186 | 136쪽 | 값 7,5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이상술(031-955-8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