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대의 슬픔이 영원히 봉인된 작은 지하세계
잊고 있던 가족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아주 특별한 시간여행
밑바닥부터 시작해 세계적인 실업가의 자리에 오른 고누마 사키치의 둘째아들 신지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작은 속옷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살고 있다. 어느 날 만취한 상태로 지하철을 탄 그는 출구 바깥의 풍경이 어딘가 모르게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그곳은 삼십여 년 전, 도쿄 올림픽과 건축 붐으로 몰라보게 변화를 거듭하고 있던 과도기의 도쿄였던 것이다. 신지는 그날이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뛰쳐나가 지하철에 몸을 던져 자살한 형의 기일이란 것을 깨닫고,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 형을 찾아 그의 죽음을 막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형을 만나고 현재로 돌아온 후에도 주위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어머니, 자신들 삼형제는 여전히 깊은 감정의 골을 껴안고 살고 있었다. 그때부터 밤마다 지하철을 통해 시간여행을 하게 된 신지는 태평양전쟁 직후 미군점령기의 암시장에서 약삭빠르지만 다부지게 살아가는 ‘아무르’라는 젊은이를 만나고, 이윽고 그 젊은이가 독선과 고집과 폭력으로 똘똘 뭉친 냉혈한이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아버지의 옛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의 과거를 통해 복잡한 가족사에 얽힌 의문을 풀어보려 하는 사이, 그는 같은 회사 동료이자 애인인 미치코와의 운명의 장난 같은 인연을 알게 되는데……
복잡한 도심 아래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서민의 발. 도시에만 존재하는 ‘지하철’이라는 이 교통수단은 인생에 지친 중년의 샐러리맨 신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다이쇼 로망’이라는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번화가, 폭격을 받아 거대한 잿더미로 변한 거리,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어준 암시장, 그리고 고도성장의 파도를 타고 불야성의 메트로폴리스로 변화한 지금의 도쿄. 과거로의 통로가 되어주는 지하철은 이 모든 시대에 걸쳐 묵묵히 땅 밑을 달려온 것이다. “인생의 몇 퍼센트를 도쿄의 지하철에서 보내온 것은 아무래도 자신만은 아닐 것이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몇 분의 일은 지하철 안에서 보내고 있다.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그물같이 둘러쳐진 이 끝없는 공간 속에서 모두 무거운 애증을 가슴에 안고서.” 그 지하철이 어느 날 가져다준 기적 혹은 장난 같은 시간여행. 언뜻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런 소재와 다르게 『지하철』은 전형적인 해피엔딩을 살짝 비껴가는 반전의 결말을 보여준다. 신지는 오랫동안 가족의 가슴에 앙금을 남기고 신지와 아버지와의 사이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만든 형의 죽음이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었단 사실을 깨닫고,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신지와 더이상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미치코는 그와의 인연을 처음부터 없애기 위해 과거의 시간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결국 신지에게 남은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도 연인과의 행복한 미래도 아닌,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얄궂은 운명의 진실뿐이다. 하지만 그는 절망으로 주저앉는 대신 다시 지하철을 타고 하루 종일 각 역의 거래처를 돌아다니는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택한다. 살아감과 동시에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점점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아사다 지로는 이 마법 같은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냉정함을 잠깐 외면하고 아름답거나 혹은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위로의 손길을 건넨다. 잊고 있던 것, 혹은 잃어버린 것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도록, 다시 앞을 향해 걸어나갈 수 있도록.
오래된 가족사진첩을 펼쳐보았을 때의 가슴 찡한 느낌. 가족과 일과 인생에 지친 사람들…… 그들의 감동적인 화해가 눈물겹다. _안도현(시인) 아사다 지로는 틀림없이 어마어마한 작가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만인에게 인정받은 것이 이 책 『지하철』이다.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그대로 그리려고 하는 한 작가의 확실한 의지이다. 그 의지 앞에 몸을 드러내면 아무리 완고한 인간이라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듯한 독후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꼭 그런 독후감을 맛보기 바란다. _하세 세이슈(작가)
옮긴이 정태원
서울 출생. 추리소설 평론가이자 전문 번역가. 옮긴 책으로 『미소 수프』 『미야모토 무사시』 『비천무』 『와일드 소울』 『백야행』 등이 있다.
* 2007년 3월 12일 발행
* 978-89-546-0284-6 03830
* 145*210 | 304쪽 | 9,500원
* 담당편집 : 양수현(031-955-8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