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시인 문인수가 제11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작 『동강의 높은 새』(2000) 이후, 오 년 만에 새 시집 『쉬!』를 펴냈다. 시인은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이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강월도 영월 소나기재’였다가 또 고개를 들면 ‘인도 갠지스 강’이다.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이미지가 되고, 노래가 되어 나오는 시인의 시심(詩心)은 땅 위의 현실에 굳건히 발딛고, 어깨 양쪽에 삶과 죽음을 하나씩 얹고 살아가는 우리네 생(生)을 선명한 이미지가 담긴 시어로 이야기한다.
눈에 밟히느니 전부 내 말이어라
시인의 시는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며, 이것은 실재하는 대상을 관조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는 자아의 관념적 사고로만 시를 쓰지 않는다. 그에게 생은 진리를 찾아가는 여행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인생에 대한 그 무슨 대답인 것 같”아서(「낮달이 중얼거렸다」) 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에 대한 그 무슨 대답”은 “낮달”에도 있고, 채석강의 “바다책”에도 있고, 시멘트 벽의 갈라진 틈새로 줄지어 돋아난 풀들에도 있으며, 타지마할 궁전과 빈민촌 빨래터가 나란히 보이는 풍경 속에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어렴풋하기만 한데다 “그 무슨 대답”이 들릴 만하면 금세 삶의 “달구질 소리에 묻”(「낮달이 중얼거렸다」)혀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대답’은 아직도 부재한다. 이제 백발이 성성한 시인은 “너무 많이 돌아다녀 뒤축이 다 닳은 족적은 그 동안/없는 뿌리를 앓아온 통점이거나 죄”(「樹葬」)라고 말하며, 사실은 답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시인이 계속 길을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에게는 “뚜렷한 부재야말로 날개”(「나비」)이기 때문이다.
저 긴 수평선, 당신도 입 꽉 다물고 오래 독대한 흔적이 있다. 바람 아래 모래 위 우묵한 엉덩이 자국이여 온몸을 실어 힘껏 눌러앉았던 이 뚜렷한 부재야말로 날개 아니냐 저 일몰 속 어디 어둑, 어둑, 훨 훨 훨 깔리는 활주로가 있다. ―「나비」 전문가던 길을 멈추고 한 자리에 눌러앉아보아도 시인에게 보이는 것은 “뚜렷한 부재”의 흔적뿐이다. 구하고자 하는 것이 부재한다는 결핍의 상태가 길을 내기에 시인은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적 행로가 시인을 영원히 길 위에 서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방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갈구하는 것이 비단 “인생에 대한 그 무슨 대답”(「낮달이 중얼거렸다」)만은 아니다. 「꽃」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며 구겨버린 종이를 방구석으로 던져버리는 시인에게 시의 산도(産道)는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이다.
동해안 먼 길 바다 직전, 그리움이 내주는 길은 거기까지다. 곶에, 목젖에 건들리며 펄럭이는 저 암흑 너무 크다. 너라는 비현실, 굳게 빗장 질린 데까지 가서 잔득 몸 웅크릴 것, 수음하며 수음하며 문장이여 말라붙어야 한다. ―「바다 가는 길」 중에서시인에게 시는 바다와 같아서, 너무 큰 암흑 앞에 길마저 끊어지고 마는, 닿을 수 없는 비현실이다. 그러나 닿을 수 없기에 더 애틋한 것이 사람 마음이고, 시인의 마음도 그러한지, 그는 모항의 길가 찻집에 앉아서 쓰린 속내를 비치기도 한다. “호랑가시나무 찻집 그 어디에도 호랑가시나무가 없어서/없는 나무가 어째 허기처럼 널 불러일으킨다//(……) 입김처럼 천천히 띠를 두르는 촉기가/마음에 발리는 부재의 시간이며 뿌우연 젖이다.”(「모항」) 그럼에도 시인은 시 쓰기를 멈출 수 없기에 홀로 내처 길을 간다.
도대체, 끝장낼 수 없는 시여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 ―‘자서’ 중에서
홀로 가는 외뿔의 시심
문인수의 시에서는 홀로 가는 외뿔의 시심(詩心)이 가감 없이 읽혀진다. 사물 속으로 자신의 전부를 투사하는 이 실재(實在)는 거친 각질이 느껴지는 그대로 단숨에 시적 대상을 요약해 보인다. 미처 우리가 돌아보지 못한 곳을 바라보는 그의 깊고 그윽한 시선은 사물이면 사물, 사람이라면 사람, 어느 것에라도 진솔하게 가 닿는 마음의 파문이 되어 독자들의 가슴에도 사무치는데, 우리는 그런 친화를 감동이라는 말로 고쳐 불러도 좋으리라. 진정한 타자성이야말로 문인수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젊지 않았던 나이에 노래를 익혀 어느새 득음(得音)의 경지를 열어젖힌 그의 내공은 그 동안의 각고가 간단하지 않았음을 일깨운다. ―김명인(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 2006년 1월 27일 발행
* ISBN 89-546-0087-5 02810
* 121* 186 | 104쪽 | 값 7,500원
* 담당편집 : 조연주 / 김경미 (031-955-8858/ 8865)